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래도 Nov 21. 2022

'모순' _ 양귀자 소설

트레바리 '책은 나의 음악' 선정도서 독후감

안진진은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인생'에 온 '생애'를 다 건다는 말 자체는 동어반복적인 표현이라 조금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그게 인생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좀 더 빨랐더라면 훨씬 좋았을 일이었다. 25세를 감히 '결혼 적령기'라 부르던 시절, 젊음을 무기로 외모가 별로이거나 병약한 친구가 '몹시 훌륭한' 슈퍼마켓 사장이나 '미남' 의사와 결혼한 사실에서 우유와 빈혈의 놀라운 활약에 대해 감탄했던 안진진이기에, 그녀의 결혼 대상 선택이 김장우가 아니라 나영규였던 것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결과였다. 그래서, 영화 '라라랜드'의 막바지에서 미아가 껴안고 키스하는, 미아가 결혼 대상으로 선택한 남자가 세바스찬이 아닌 진진이 이모부 같은 인상의 남자였던 것을 알았을 때만큼 극적이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좋아하는 걸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날" 아이유의 '팔레트'를 들으며 스물다섯의 안진진을 연상한다. "스물 위 서른 아래 고맘 때 Right there 애도 어른도 아닌 나이 때 그저 나일 때 가장 찬란하게 빛이 나" 세상의 연하고 희미한 것을 눈여겨볼 줄 아는 김장우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가 앞으로 꾸려갈 생계의 미래 역시 연하고 희미했다. 야생화는 우연히 무계획적으로 나타나서 더 아름답지만 그가 꿈꾸는 무계획적인 삶은 비바람 속 큰들별꽃만큼이나 가냘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진진은 그에게 자신과 가족에 대한 진실을 끝내 감추며 거리를 둔다. 그래서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헛헛한 찬바람만 마음에 가득할 뿐이었다. 김장우에게 어쩌면 안진진은 우연히 마주친 빛이 나는 들꽃이었다. '정말 착하고 착한 내 안진진'이란 이름의 들꽃. 안진진은 진작에 인생에 생애를 걸었더라면 김장우에게서 더 빨리 벗어났을 것이다.


그렇게 진작 하지 못한 안진진은 두 남자와의 관계에서 놀랄 만큼 수동적 태도로 일관했다. 전화가 오는 순서에 맡겨 그날의 계획을 정하듯 자신을 속이고, 김장우와 만날 때는 그의 무계획에 답답해하면서도 자기도 역시 좀처럼 의견을 내지 않는다. 나영규와 만날 때는 자기 계획도 없으면서 상대의 계획성을 부담스러워하며 그렇다고 계획적인 그에게 그런 것이 불만이라는 표현도 하지 않는다. 나영규는 진진에게서 너무 계획을 세우려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계획을 세우지 않으려는 계획을 세울 것 같은 MBTI의 'J'가 강한 특징의 사람이며 그것이 굳이 단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안진진은 자신의 어려운 가족 상황을 그에게만 털어놓아 그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며 관리한 끝에 그를 결혼 파트너로 만든다.


'슬픔도 힘이 된다'. 양귀자 작가의 다른 소설집 이름이기도 한 이 문장은, 고난을 땔감 삼아 태워 가며 더 열심히 길을 달려가는 안진진의 어머니 같은 분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반면에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외로움에 축축하게 젖어 시들어버리는 안진진의 이모와 같은 경우도 본다. 우리는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쉽게 말하지만 제대로 마음을 터놓을 곳이 없는 절망의 상황은 이해의 영역을 쉽게 넘어서고,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삶에 '모순'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그래서 모순은 이해되지 않음과 동의어이고, 또 그러므로, 이해의 눈길로 조금만 넓혀서 보면 세상에 모순은 없는 것이다.


'모순' 고사에 나오는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여러 번 반복하여 계속 찔러 방패가 뚫렸다 치자. 어느 한 편의 사람들은 창이 마침내 방패를 뚫었다고 할 것이고, 다른 한 편의 사람은 한 번에 찔러서 뚫어야지 여러 번 찔러 뚫으면 그게 전쟁에서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건 뚫은 게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뚫었으나 뚫은 것이 아닌 경우 역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으며, 그래서 다시 투닥투닥 거리는 상황이 인생에서는 흔하게 벌어진다. 사실 말하자면 반대로 방패로 창을 뚫는 경우마저 생길 수 있고, 1998년의 소설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모순이며 그런 것이 또 삶이다. 그래서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지만 그 또한 투닥거리며 이해하며 살아갈 만한 것이다. 이제 Twenty five의 두 배가 조금 넘은 삶이면서도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날"이라는 말을 겨우 할 정도밖에 안 되면서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 셜리 클럽' _ 박서련 소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