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다. 마포에 저녁 약속이 있어서 퇴근 후 차를 가지고 여의도 더현대백화점 앞 네거리에 다다랐다. 마포로 가려면 여기서 직진한 후 다음 교차로에서 좌회전하거나 여기서 바로 좌회전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내비게이션은 다음 교차로 좌회전을 추천했고 나는 그에 따라 직진 차선에 차를 멈췄다. 차선 맨 앞이었다. 좌회전 신호에 불이 들어와있는데 신호 끝물인지 좌회전하는 차는 더 이상 없었다. 문득 지금 좌회전하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하자.' 핸들을 틀려고 하는데 갑자기 차 왼쪽으로 무엇인가 쐐앵하며 지나갔다. 배달 오토바이. 좌회전 신호인데도 빠른 속도로 달려와 직진으로 거의 스쳐 지나갔다. 순간 몸이 오싹하며 머리가 멍해졌다. 신호등을 보느라 오토바이가 달려오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만약 내가 1초만 더 빨리 움직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신호를 지키지 않은 오토바이와 자동차끼리 부딪히는 상황. 좌회전 차선에서 직진하던 오토바이는, 급브레이크에도 미끄러지며 직진 차선에서 좌회전하는 차 왼편 앞문을 들이받는다. 빠각하는 충격음과 함께 오토바이는 멀리 날아가 떨어지고, 자동차는 문이 움푹 찌그러진 채 교차로 중간에 떠밀려 멈춘다. 퇴근길 사람들 중 몇 명은 비명을 지르고 길이 막혀버린 차들은 경적을 울려댄다. 곧이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 견인차, 구급차가 차례로 도착한다. 아스팔트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파편들. 나는, 그리고 오토바이 운전자는 어떤 모습으로 이런 상황을 맞이할까?
정신을 차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마포로 향했다. 약속 장소 근처 공영 주차장에 들어갔는데 좁은 내부인 데다가 거의 만차라서 빈 주차공간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빈 곳을 찾으러 코너를 도는데 다른 차가 모서리 반대편에 정차하고 있어 제대로 돌기가 힘들었다. 공간을 내주지 않는 차를 피해 어찌어찌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뒷문 쪽에서 뭔가 드드득 끌림이 느껴졌다. 백미러를 보니 내 차가 주차된 차의 앞범퍼를 긁고 있었다. 아뿔싸. 앞에 서있는 차를 잘 피한다고 보느라 옆을 미처 보지 못했다. 차를 세우고 확인해 보니 상대차 범퍼에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차에 전화번호가 적혀있지 않아 메모지에 간단한 사유와 연락처를 남겨 앞유리에 꽂아놓고 약속 장소로 왔다.
지인들과 같이 저녁으로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도 전화기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차 주인은 뭐라고 하려나, 내 기준은 살짝인데 차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보험 처리는 어쩌지, 아 오늘은 뭐 이러냐 등등 복잡한 생각을 하느라 고기를 몇 점 태워먹었던가. 한참 지나 메시지가 도착했다. 차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메모 발견하고 살펴보니 별다른 이상 없어 보여 괜찮다고 했다.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안전 운전하시라는 덕담도 덧붙여 있었다. 고마웠다.
큰 사고는 용케 피한 대신, 작은 사고로 액땜을 하고 너그러운 용서까지 받은 하루였다. 앞으로 운전할 때는 신호에 위반되는 일은 하지 말고 살펴가며 잘 운전하라는 교훈을 싸게 얻은 셈이다. 액땜은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큰 액을 가벼운 곤란으로 막는다는 뜻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1초의 차이. 지금껏 무사하게 살아오고 있지만, 그 안에 나도 모르게 액을 때워 피해온 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찰나의 우연과 인연이 겹쳐 삶은 나아간다. 때우는 일은 삶의 구멍을 메워 무사히 지나가도록 돕는 일이다. 앞으로도 이번처럼 놀라더라도 크지 않은 액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액을 잘 때워가며 막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