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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2. 2019

주름잡으셨다

흥인지문 사거리를 지나가다가 한 이름의 가게를 보았다. 가게 이름이 ‘명동 주름’이다. 창문에 ‘꽈배기 주름’, ‘후리아 주름’. ‘각종 주름 전문’, 쓰여있는 걸로 봐서는 옷감에 주름을 잡아주거나 주름진 옷감을 파는 곳인가 싶었다.


'주인은 주름잡고 사시겠구나.'


가게의 정체가 궁금해서 검색창에‘명동 주름’을 검색해보고 당황했다. 팔자 주름, 눈가 주름 등 얼굴의 온갖 주름을 갖가지 시술로 펴주겠다는 명동의 피부과들이 '저요 저요.' 하면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주름에는 예쁘게 잡아야 할 것이 있기도 하지만, 펼쳐 없애 싶은 것도 있었다.

피부에 생기는 잔 줄, 주름은 피부에 탄력이 떨어지며 생긴다. 대부분 피부 노화 때문이다. 연장자의 지혜가 인정받던 시기,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원로의 경험에 기댄 지혜로운 처방을 구하던 시기에는 주름은 지혜의 상징이었다. 주름 하나하나마다 삶의 지혜가 깃들었다고 여겼다.


시간이 흘러 기술 진보가 속도를 내면서, 옛 경험에 의한 판단이 꼰대의 고집으로 취급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안티에이징이 대세다. ‘주름이 진다’, ‘주름이 생겼다’, ‘주름이 깊어졌다’ 같은 ‘주름’ 표현 부정적 느낌으로 다가온다. 주름을 없애는 시술은 삶이 본질적 무시를 피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겠다.


‘주름잡다.’라는 말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서 한창 잘 나갔을 시절을 표현할 때 쓴다. 피부에 삶의 흔적으로 남은 주름의 기억 속에는 '잘 나가던 시절'이 들어있다. 그 시절 많이 사용한 근육의 흔적이 주름진 표정을 만든다.


주름  주인이 치익치익 뜨거운 스팀을 쏘아가면서 옷감에 주름을 만들어내듯, 우리각자 세월 속 뿜뿜하며 주름을 빚어왔다. 각자 스스로의 주름 집 주인이다. 


세월이 묻어나는 주름 집의 노란색 간판을 통해 주름 집 주인장은, 우리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서 주름 잘 잡아가며 지혜롭게 살아가라며 우리에게 메시지를 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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