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햇살이를 만난 날.
뭐야 이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순간. 누런 솜뭉치가 거실을 뒤뚱뒤뚱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긴? 강아지지. 귀엽지? 방금 데려왔어.
기습적이다.
우선 오늘 반려견을 집으로 데려오는 줄 몰랐고, 데려온 강아지가 이렇게 생겼을 거라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최근까지도 반려견을 키울지 말지 조차 완전한 가족 간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동생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애견샵에 갔다가 이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바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동생은 그동안 공장식 분양 업체를 배제하고 개인 가정에서 태어난 강아지와 연계해서 판매하는 애견가게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그중 한 업체에서 새로운 강아지 두 마리가 들어왔다고 보러 오라고 했단다. 구경이나 할까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샵에 갔던 동생은 두 마리 중 더 예쁜 강아지가 더 마음에 들었는데 누런 이 녀석과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 녀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녀석의 눈망울이 자신을 꼭 데려가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데려오면 어떡하냐. 그리고 애가 왜 이렇게 누렁이야.
사실 가장 큰 불만은 갑자기 데려온 것 때문이 아니라, 상상했던 것과 다른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새하얗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포메라니안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누런 솜뭉치라니. 거기다가 이목구비는 유치원생이 스케치북에 동그라미 얼굴을 그린 후 그 안에 크레파스로 콕. 콕. 찍어 눈 코입을 대충 만든 것처럼 둥글고 평면이었다.
곧이어 어머니가 집에 오셨고 저녁 늦게 아버지도 들어오셨다. 다들 현관문 열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반응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누런 솜뭉치 같은 애가 왔네.
가족이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동생은 햇살이를 들어 올려 얼굴에 갖다 대면서 아니, 귀엽지 않냐고! 누가 대신 갔더라도 이 녀석과 눈이 마주치면 절대 두고 올 수 없었을 거라고! 그때 상황을 반복해서 설명했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녀석은 가족의 얼굴 앞에 들이밀 때마다 작은 혓바닥으로 홀짝홀짝 얼굴을 핥으려고 했다. 그러면 한결같이 모두 얼굴을 피하며 말했다.
"에잇. 입에 뽀뽀하려고 한다."
지금은 그런 행위를 애교로 잘 받아 주지만 그 당시엔 불편했다.
왜냐하면 이전에 우리가 키웠던 건 '반려견'이 아니라 '집 지키는 개'였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 첫 번째 '개'는 여섯 살 때쯤이다.
그 당시 우리는 주택에 살았고, 내 친구도, 내 친구의 친구도, 부모님의 친구도 모두 각각의 주택에 살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주택은 일렬로 줄지어 있고 주택과 주택 사이엔 골목이 있었다. 그리고 좀도둑도.
굳이 TV 뉴스를 통하지 않아도 '어제 낮에 누구 누구네 집에 도둑이 들었었대'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흔한 카더라 통신이었다.
그래서 개가 있었다.
우리 집에도 개가 있었고 동네 아주머니들 집에도 개가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우리 집에 훔쳐갈 건 없지만, 어렵게 들어왔는데 훔쳐갈 것도 없다고 도둑이 해코지하면 어떻게 해. 나는 그게 더 걱정돼. 그러니깐 혹시 개가 새끼를 낳으면 우리 집에도 한 마리 줘."
그런 시절이었다. 개는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키는 존재. 도둑을 발견하면 번개처럼 달려들어 주인을 보호하고 집을 지키는! 역할까지.. 바라는 건 욕심일 테고, 적어도 으르렁 거리고 멍멍 짖어서 쫓아버리길 바라는 존재.
지금으로 비유하면 일종의 방범시스템 '캡스'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기계식 방범 시스템은 집으로 불청객이 침입하면 경보음이 울리지만, '독스(dogs)'는 도둑이 집으로 침입하기 전에 미리 울리는(짖는) 시스템이다. 그러니까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사전차단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우리 골목 안쪽에서 두 번째 집 아주머니는 파란 대문에 '개조심'이라고 크게 글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 -물론 개조심할 만큼 사나운 개는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골목 내의 낮은 주택들은 이층 주택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이사를 나가기도 하고 새롭게 들어오기를 반복했지만 골목 내의 '개'들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골목 전체가 거대한 방범 네트워크와 같았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집은 골목의 맨 안쪽 이층 집이었기 때문에 우리 개집에서 골목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만약, 골목으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우리 집 개가 가장 먼저 발견해서 짖었다. 그러면 다른 집 개들도 연달아 짖어댔다. 이런 상황이니 어떤 간 큰 도둑이 골목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는가? 그런 시스템이-의도한 건 아니지만- 갖춰지고 난 후 우리 동네에 도둑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동네 개들은 모두 현관문 바로 앞 개집에서 따로 살았고, 전용 사료가 아니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었다. 동네 사람들은 누구 집에 어떤 개가 있는지 다 알았고, 어디선가 뼈다귀나 갈비 같은 걸 구하면 개를 키우는 이웃을 위해 일부러 따로 챙겨주기도 했다. 같은 음식을 먹지만 겸상하진 않고 같은 집에 살지만 영역은 확실히 분리된 관계. 밖에서 키운다고 막 대하거나 함부로 키운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확실히 분리된 주거공간은 전통적인 개와 사람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우리는 오랜 주택 생활을 마치고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파트로 이사하면서는 꽤 오랫동안 '개'를 키우지 않았다. 도둑의 위험이 적었고 아파트에는 마당이 없으니깐. '집 지키는 개'의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그 사이에 시대는 점점 변했다. TV 동물농장 같은 프로그램이나 애견 관련 방송은 이제 집안에서 개를 키우는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동생과 나는 우리도 집안에서 강아지를 키워보는 건 어떻겠냐고 부모님께 여러 번 이야기했다. 얼마나 귀엽냐고. 집안에서 저렇게 함께 생활하면 활기도 돌고 좋을 거 같다고. 그러나 부모님은 같은 주거 공간에 강아지를 들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셨다.
어머니는 혹시라도 입양하는 강아지가 똥오줌을 제대로 못 가려서 우리가 먹고 자는 집안 아무 곳에나 싸면 어떡하냐. 집안에 날리는 털은 또 어떡할 거고. 너네들이 다 치울 것도 아니잖아. 걱정하셨고, 아버지는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인데 어떻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냐고, 짖으면 이웃집에서 항의 들어올 수도 있지 않느냐. 우려하셨다. 나는 사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없어도 크게 상관은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계속해서 입양할 반려견에 대해 알아봤고 결국은 미리 예고도 없이 급하게 누런 솜뭉치를 데려온 것이다.
처음엔 이렇게 갑작스럽게 애를 데려오면 어떡하냐고. 애는 또 왜 저렇게 누렇냐고 저마다 불만 섞인 소리를 내뱉었지만, 어쨌든 귀여운 생명체의 천진난만한 애교에 점점 식구들의 관심은 늘어났고, 집안은 어느새 애견 용품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박스째 쌓여있는 배변패드,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열리는 사료 지급기, 혀를 내밀면 물이 나오는 물통, 푹신하지만 얇은 방석, 그리고 작은 인형들이 하나둘씩 거실 한편을 채워갔다.
처음 집에 왔을 때 못난이 인형이라고 이목구비 없다고 워낙 놀려서 그런지, 녀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란 듯이 다리도 길어지고, 주둥이도 앞으로 나오며 이목구비도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누런 털 속에선 검은색과 하얀색 털이 자라며 색의 조화를 이뤘다. 더러워서 어떻게 함께 키우냐던 식구는 이제 외출해서 집에 오면 먼저 손부터 씻고 녀석을 안을 만큼 오히려 스스로의 위생에 더 신경 쓰게 됐다.
그렇게 햇살이는 '집 지키는 개'가 아닌, 첫 '반려견'으로 우리 집의 새로운 식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