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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신 Sep 13. 2020

나를 두고 간 엄마

누구나 플라타너스를 키운다

기억하건, 사십 년 전 그날도 오늘처럼 이른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졌다.

 

엄마는 잠에 빠져있던 나를 재촉해서 깨웠다. 그 목소리는 꿈속에서 들리는 듯했다. 나는 이불을 다리사이에 끼고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뒹굴거리며 재촉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애써 피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빗소리가 점점 커져서 그렇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난 건, 빗소리가 왕사탕만 해질 때쯤이었다. 나는 왕사탕을 좋아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도 좋았지만 사탕 겉면에 묻어있는 굵은 설탕 조각들의 까슬함이 좋았다. 그리고 왕사탕 몇 알을 녹여가며 천천히 빨아먹으면 엄마가 없는 집 안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딜만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자리에서 눈을 비비고 일어나며 영수랑 딱지 따먹기를 하기로 했는 데, 이 망할 놈의 비는 왜 내리는 건지, 비가 계속 내리면 어디서 딱지 따먹기를 해야 할지, 영수네 집에서 해야 할지, 아님 우리 집에서 해야 할지, 얼마나 따야지 영수가 울지 않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재촉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문득 엄마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슬프게 들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아빠가 원망스러워 입술을 한 껏 내밀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와 나만 두고 간 아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집 단칸방 처마 위로  '투둑 투둑' 소리를 내는 굵은 빗방울이 끝도 없이 떨어져 부엌 바닥에 있는 내 신발이 젖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엄마, 어데 가는데? 응? 오후에는 올 수 있나?"


엄마와 나는 이른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엄마는 어딜 가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앞서 걸어가기만 했다. 비가 오는 날 신발 젖는 걸 싫어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영수랑 딱지 따먹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오후에는 영수를 만나서 딱지 백 장 정도는 따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버스에 올라탔다. 멀미가 심했던 나는 곧 잠에 빠져 들었고, 얼마나 갔는지, 어떻게 갔는지, 몇 번 버스를 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해가 중천에 오른 후에야, 우리는 커다란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그곳에 겨우 도착했다. 그곳 대문 건너편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 몇몇이 놀고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얼굴이 수박만 한 돼지 같이 생긴 놈이 놀다말고 대문앞에서 기웃거리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심통이 나서, 대갈.. 아니 그 머리 큰 녀석에게 나는 주먹을 들며 입모양으로 욕을 했다. 그 녀석은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저 쌈잘하는 아이 처럼 보여야겠다 생각하며 눈을 더 크게 뜨고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녀석과 한참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사이에 엄마는 어떤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갈.. 아니 그 녀석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에 허공을 대고 발길질을 하고 있을 때, 엄마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내 손에 동전 몇 개와 종이돈 몇 장을 올려주었다. 왕사탕을 백 개정도는 사 먹을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다. 돈을 보며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나를 안으며 엄마가 말했다.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해야 된다. 엄마가 곧 데리러 오께. 미안타, 미안타, 미안타."


엄마는 꼭 끌어안은 팔을 풀고는 곧장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무 사이로 나를 남겨두고 우산을 펴 들었다. 나는 돈을 보며 왕사탕을 몇 개나 사 먹을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었다. 겨우 여덟 살이었던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돈이 없는 엄마에게서. 아빠는 엄마에게 뭘 남겨준 것도 없이 돌아가셨다. 아빠는 집 짓는 일을 했다. 높은 건물을 짓는 일이라고 했는데, 내가 일곱 살 때 그곳에서 떨어져서 돌아가셨다. 아빠의 죽음 때문에, 엄마는 일터에 갈 수밖에 없었다. 아빠 얼굴만 보던 엄마가 무슨 재주가 있었겠나.


그런 엄마에게서 여덟 살 평생 손에 쥐어본 적이 없던 돈을 받았으니. 왕사탕을 몇 개나 사 먹을지 셈을 하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를 들고 우산을 쓰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눈 앞이 흐려졌다. 어디선가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고, 손에 들고 있던 동전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는 뒤돌아 보지 않았고, 심지어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향해 소리치며 울었다.


"이걸 가꼬 뭐 하라고 하노, 어데 가노, 왜 나를 두고 가노.. 엄마!"  


나는 엄마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내 옆에 서 있던 원장 아저씨가 내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더 크게, 더 크게 울었지만, 엄마는 내 울음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의 뒷모습이 내 눈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 머리가 수박만 하고 돼지같은 그 녀석의 얼굴이 흐려진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녀석이 '씨~익'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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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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