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신 Sep 15. 2020

내 친구, 대갈

누구나 플라타너스를 키운다

https://brunch.co.kr/@desunny/47

(앞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나는 흐린 눈으로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씨~익', 하고 웃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라 수박만 한 대갈에 코피가 나게 하고 싶었다. 나는 왼쪽 발로 땅을 박차고 일어나 녀석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녀석은 슬쩍 피해버렸다. 엉엉 울며 달려들던 나는 원장 선생에게 뒷덜미를 잡히고서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와 떨어져 불안한 마음에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엄마는 어딜 갔을까. 왜 나를 두고 갔을까.


그날, 나는 갈색 지붕의 낡아빠진 3층짜리 보육원에 첫발을 디뎠고 그로부터 12년이 흘러서야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나를 보고 '씨~익' 웃던 수박만 한 얼굴의 돼지는 내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놈을 '대갈'로 불렀으며 그놈은 나를 '똥수'라 불렀다. 내 이름 '박동수'를 딴 별명이었다. 녀석은 보육원에서는 늘 웃고 다녔지만 밖에만 나가면 사나운 멧돼지가 되어, 학교를 휘어잡았고 나는 그런 녀석에게 의지를 했다. 


녀석이 학교를 휘어잡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4학년 여름 방학을 앞둔 어느 더운 날, 대갈과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돈이 없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되는대로 지껄이며 학교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야, 저거 대가리 진짜 크네, 야 봐봐, 저기.. 저거. 수박이 동동거리며 떠다니는 거 아이가?" 

"맞네, 와.. 씨바, 엄청 크다. 나 같으면 디진다 디져.." 

"와, 불쌍하네.. 엄청 크다 진짜"  


담벼락 너머에서 대갈을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갈의 얼굴을 쳐다봤다. 대갈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져 있었다. 


"고마 참아라.. 참아.." 나는 대갈의 팔을 치며 말했다. 

"씨바.. 뭐꼬 저거.." 그 와중에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대갈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대갈은 담을 넘었다. 5학년들은 잠깐 움찔하는 듯했지만, 이내 욕을 하며 으름짱을 놓았다. 나는 담벼락을 돌아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그 사이 대갈과 5학년들은 엉겨 붙었다. 대갈은 가까이 있던 한 명의 멱살을 잡고 바깥 다리를 걸어 뒤로 밀어버렸다. 달려드는 다른 한 명은 슬쩍 피하며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다른 한 명은 먼저 달려들어 머리로 코를 박아버렸다. 뒤로 밀려 넘어진 5학년이 일어나 대갈에게 달려들었다. 대갈은 왼쪽 발로 땅을 박차고 온 몸으로 달려들던 5학년의 가슴팍에 치받아 버렸다. 뒤로 밀려 나자빠지는 5학년의 얼굴 왼쪽 뺨을 발을 들어 밟아 버렸다. 앞으로 넘어진 5학년은 어느 틈에 일어나서 대갈을 뒤에서 잡았지만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흔들자 휘청거리며 오른편으로 떨어져 나갔다. 대갈은 휘청거리는 5학년의 옆구리를 오른발로 걷어차고 얼굴에 왼쪽 주먹을 날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대갈 뒤에서 움찔거리며 서있었고, 내 주위에는 어느 틈에 아이들이 잔뜩 몰려서 싸움 구경을 하고 있었다. 5학년 한 명은 코피가 터졌고, 한 명은 왼쪽 얼굴에 발자국이 났다. 다른 한 명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었다. 지금이야 난리가 났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애들 싸움이야 늘 있는 일이었고.. 또, 5학년들은 나이 어린 하급생, 그것도 한 명에게 얻어터지다 보니 쪽팔렸던지 쉬쉬하며 조용히 넘어갔다. 그러나, 대갈은 그 이후로 학교에서 싸움 잘하는 아이로 오르내렸다. 아이들은 누가 누구랑 싸우면 이긴다는 둥, 진다는 둥 말싸움을 할 때 영락없이 대갈의 이름을 집어넣었다. 


대갈은 그야말로 사나운 멧돼지 같았다. 그런 녀석에 비해 나는 공부는 잘했지만 몸이 약했다. 딱지 따먹기를 하며 놀던 영수를 때려 코피를 내게 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영수는 그냥 약골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나를 대갈이 지켜주었고, 보육원의 누나들이 살펴주었다. 학교에서 힘센 놈들에게 엄마도 아빠도 없는 아이라고 놀림을 받은 날이면 누나들이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대갈은 그 녀석들 얼굴에 꼭 발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꼭 엄마 꿈을 꾸었다. 엄마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끝없이 늘어선 길 위에 서있었다. 우산을 쓰고 내게 등을 돌린 채로. 꿈속에서 나는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하지만 엄마는 등을 돌리고 걸어가기만 했다. 쫓아가면 멀어지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엄마의 모습에 소리소리 지르며 울음보를 터트려야만 겨우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엄마 꿈을 꾼 날에는 먹고 싶지도, 놀고 싶지도 않았다.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나에게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이쁜 미자 누나는 꼭 왕사탕을 주었다. 나는 왕사탕을 대갈과 나누어 먹었고, 대갈은 나에게 장난을 걸어 결국 낄낄거리며 웃게 만들었다. 대갈은 내 초등 시절의 보호자였고, 내 앞에서 웃어주던 친구였다. 


대갈과 나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도 보육원에 함께 있었다. 곧 데리러 온다던 엄마는 내가 보육원에서 나올 때 까지도 오지 않았고, 대갈도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스무 살이 된 우리는 거지같이 낡아빠진 보육원에서 겨우 가방 하나 둘러메고 함께 거리로 나왔다. 그날도, 비가 왔다. 내가 그곳에 들어간 그 날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플라타너스 거리는 밤새 쏟아진 비로 진흙창이 되어 있었다. (계속)


(다음 편 글입니다) 

https://brunch.co.kr/@desunny/53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두고 간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