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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형사 Jan 26. 2021

날치기 사건의 유일한 증거...전자사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경찰을 꿈꾸다...

  

날치기 사건의 유일한 증거... 전자사전


예전에는 입학 선물로 비싼 노트북보다 전자사전이 더 인기가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요새는 폭주족들을 거의 볼 수가 없는데, 배달 대행업체 때문에 그런지 마후라의 굉음을 내며 도로를 질주하는 젊은이들은 보기가 힘듭니다. 10여 년 전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성의 핸드백을 낚아채는 날치기 범죄가 종종 발생했는데 여성분이 핸드백 줄 때문에 끌려가다 넘어져 크게 다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날치기범에 대한 첩보가 한건 들어왔는데, 범인이 술자리에서 자기가 날치기를 50여 건 이상을 성공했다고 자랑을 하였고, 그 얘기를 들은 지인이 제보를 한 것이었습니다.


물증은 없고 간접 진술만 있던 첩보였는데, 며칠 후 용의자의 집을 압수수색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찾은 것은 핑크색 전자사전 하나뿐이었고 집에는 오토바이도, 오토바이와 관련된 물건도 없었고 핸드백처럼 피해품으로 보이는 물건도 없었습니다. 용의자는 전자사전이 자기 것이라 주장했지만 핑크색이라 여자 것으로 추정되어 그것 하나만을 압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용의자는 운전면허가 없었습니다. 오토바이도 없고 탈 줄도 모른다면서 누구의 밀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날치기를 한 적이 절대 없다고 버텼습니다.

간접증언뿐인 상태에서 저희는 난감했고 어떡해서든 피해를 당하신 분을 한 명이라도 찾아내야 했습니다. 핑크색 전자사전의 주인을 찾기 위해 지방에 있는 제조회사에 찾아갔습니다.

회사 직원에게 전자사전을 보여주며 구매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마도 찾기 힘들 거라고 답했습니다. 그 회사는 중소기업이었는데 따로 구매자 관리를 하지 않고 제품번호로 봐서는 서울 지역에 출고된 정도만 확인이 가능한데, 그 후에서 여러 판매처를 통해 판매되기 때문에 A/S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구매자를 자신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와 혹여나 전자사전 안에 뭔가 있을까 여러 차례 찾아봤지만 제품은 거의 손을 안 댄 새 제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용의자는 경찰이 자기 물건을 불법으로 압수했다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서에 항의 전화를 해댔습니다.

경찰 전산망을 이용하여 최근에 전국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의 피해품 중에 전자사전이 있는지 검색을 해봤지만 역시 없었습니다.

신중하지 못한 첩보 판단으로 허위제보에 경찰이 놀아나 무고한 시민을 용의선상에 올리고 사유재산을 강제 압수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습니다.

저희 수사팀은 용의자의 전과나 첩보제공자의 진술의 신빙성 등 용의자가 범인이라는 심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습니다. 피해자를 찾지 못하면 사건을 무혐의로 검찰에 송치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렸습니다.

저는 다시 전자사전을 열어 아무거라도 좋으니 하나만이라도 찾고자 이것 저것을 누르던 중 캘린더의 그 다음해 5월달의 19일 숫자가 다른 숫자보다 조금 굵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념일 체크를 해제하니 글씨가 얇아졌습니다. 몇 차례 찾아보았지만 못 봤던 것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었고, 그 전자사전에 있던 유일한 표시였으며 전자사전의 주인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습니다.
 
제조사에 전화를 걸어 5월 19일이 혹시 제품의 출고일인지 물어봤지만 아니라고 했습니다. 분명 전자사전의 주인에게는 특별한 날이라 구입하자마자 달력에 표시를 해 놓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다시 경찰 전산망으로 범행 추정기간 3개월간의 전국 절도 발생 사건 3천여 건을 추출한 다음, 다시 피해자가 여성이고 대학생, 그러니까 20대 초중반 여성인 사건 7백여 건을 다시 추출하여 그중에서 생일이 5월 19일인 여성 9명을 선별했습니다.

선별한 9명의 피해자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고, 5번째로 전화를 걸은 여성분이 날치기당한 가방 안에 전자사전이 들어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문자메시지로 압수한 전자사전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자신의 것이 맞다고 하였고, 드디어 전자사전의 주인을 찾아낸 순간이었습니다.

 

 

전자사전

 

 
피해자분은 대학교 신입생이셨는데 부모님에게 전자사전을 선물로 받은 날 날치기를 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날치기를 당한 후 경찰서에서 신고를 할 때 너무 떨리고 경황이 없어서 전자사전을 피해품 목록에 적지 못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사건의 담당인 ○○경찰서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담당 형사는 수사를 상당히 많이 하였지만, 헬멧을 쓰고 번호판도 없이 수십 킬로를 도주하는 오토바이의 추적에는 실패하였다면서, 저에게 자기 사건의 날치기범을 잡았냐고 오히려 되물었습니다.

그쪽 형사가 확보한 CCTV 사진을 받았습니다. 날치기에 이용된 오토바이의 종류와 헬멧 색상, 범행시의 용의자의 복장을 알아냈고 그 복장은... 용의자의 집에서 전자사전을 압수할 때 분명히 제 두 눈으로 장롱에서 본 바로 옷이었습니다. 순간 온몸에 전기가 '찌릿~' 흘렀습니다.

무고한 시민의 전자사전을 불법으로 압수했다고 항의하던 용의자는 결국 구속이 되었고, 이후 보강수사를 통하여 여죄 50여 건을 모두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경찰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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