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소방 호스의 밸브가 잠기자 거짓말처럼 고요가 찾아왔다.
물에 젖어 퉁퉁 불어버린 손, 저체온증으로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선수들은 좀비처럼 연습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그저 백강후가 정한 '표적 적중'이라는 선을 넘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낸 잔해들뿐이었다.
백강후는 젖은 수건을 목에 건 채 연습장 한쪽에 미리 차려진 간이 식탁으로 선수들을 불렀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해장국 대여섯 그릇이 놓여 있었다.
"먹어라. 안 죽으려면."
백강후의 짧은 한마디에 선수들은 서로를 눈치 볼 새도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여기저기서 윽~ 하는 신음과 함께 참았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두석이 국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강건한을 힐끗 보더니 툭 내뱉었다.
"아까 보니까... 너, 물줄기 사이로 휘두를 때 폼은 좀 잡더라.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독종이네."
강건한은 대답 대신 고개를 처박고 국물만 들이켰다. 하지만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유시영은 떨리는 손으로 서한결의 숟가락 끝을 보았다. 국밥을 먹는 동안에도 서한결의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빗속에서 본 서한결의 샷은 그 떨림조차 계산된 진동처럼 느껴질 만큼 정교했다.
식사가 중반쯤 지났을 때 백강후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오늘 각자의 결함이 어떻게 무기가 되는지 확인했다. 한결이, 네 떨림은 입스가 아니라 '극도로 예민한 감각'이다. 남들이 못 느끼는 0.1밀리미터의 오차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지. 빗물로 시야를 가렸을 때 그 감각이 살아난 건 너의 뇌가 불필요한 공포를 버리고 오직 손끝의 데이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서한결이 숟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백강후를 바라보았다. 칭찬이 아니었다. 무심한 진단이었지만, 평생 그를 괴롭혔던 '병'을 처음으로 '기능'이라고 불러준 유일한 말이었다.
"오두석, 너는 그 넘치는 화를 억누르지 마라. 대신 그 분노를 채 끝에 실어서 공을 짓이기는 힘으로 바꿔봐. 윤새봄, 너는 결핍이 네 근육이다. 가진 게 없어서 지킬 게 없는 그 독기가 네 스윙을 망설임 없게 만들 거다."
백강후는 남은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함은 고치는 게 아니다. 인정하고 이용하는 거지. 내일부터는 그 결함들을 더 정밀하게 다듬는다. 씻고 한숨 자고 2 시간 뒤에 다시 모여."
백강후가 떠난 자리, 선수들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전의 적대감은 뜨거운 국물과 함께 녹아내렸고, 그 자리엔 '나만 괴물인 게 아니구나'라는 동질감이 채워졌다. 김인아가 처음으로 윤새봄에게 젖은 수건 하나를 말없이 건넸다. 새봄은 잠시 주춤하다 수건을 받아들였다.
같은 시각,
데이터 팀의 사무실 불은 꺼질 줄 몰랐다. 밤새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기록된 선수들의 샷 데이터는 기존 골프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변칙적 완벽함'을 그려내고 있었다.
운영팀장 박석진은 모니터 속의 수치들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사냥을 나갈 시간이 됐네요.
"씻고 2 시간 뒤에 다시 모여."
백강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탁 여기저기서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2 시간. 씻고 누우면 눈만 한 번 깜빡여도 사라질 시간이었다. 그들은 각자 배정된 숙소로 좀비처럼 발을 끌며 흩어졌다.
유시영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맞으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졸았다. 찬물에 불어 터진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렸지만, 묘하게 정신은 맑았다. 아까 백강후가 했던 말, '결함은 고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라는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숙소 방 안. 강건한과 오두석이 같은 방을 쓰게 됐다. 평소라면 코골이가 심하네, 덩치가 크네 하며 싸웠을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두석은 침대에 눕자마자 1초 만에 코를 골기 시작했고, 강건한은 그 소음을 자장가 삼아 젖은 머리도 말리지 못한 채 기절하듯 잠들었다. 적대감보다 더 무거운 육체의 피로가 그들을 강제로 화해시킨 셈이었다.
같은 시각, 백강후는 연습장 한구석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려다 말았다. 그의 앞에는 데이터 팀장이 들고 온 태블릿이 놓여 있었다.
"코치님, 애들 심박수랑 근육 피로도가 한계치입니다. 2 시간 뒤에 바로 훈련 재개하면 사고 날 수도 있습니다."
백강후는 태블릿 속의 뇌파 그래프를 응시했다. 선수들이 잠든 사이, 그들의 뇌는 밤새 빗줄기 속에서 쳤던 그 감각을 무의식 중에 재정리하고 있었다.
"알아. 그러니까 2 시간 뒤엔 골프채 대신 '이거' 준비해."
백강후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전신 얼음찜질팩'과 '수면용 안대'였다.
2시간 뒤,
비몽사몽한 상태로 다시 모인 선수들은 또 다른 지옥을 예상하며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건 타석이 아니라 안락의자와 얼음 더미였다.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소리 내지 않는다. 눈 감고, 아까 그 빗물 속에서 공이 헤드에 맞던 그 '진동'만 머릿속으로 무한 반복해. 몸은 쉬어도 감각은 쉬게 하지 마라."
백강후는 직접 선수들의 눈에 안대를 씌워주었다. 강제적인 어둠 속에서 선수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음의 냉기가 근육의 염증을 식히는 동안,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번의 가상 스윙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것은 단순한 잠이 아니었다. 백강후가 설계한 '감각의 이식' 시간이었다.
안대 너머의 어둠은 깊고 무거웠다. 처음에는 얼음팩의 냉기와 근육통 때문에 뒤척이던 선수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잊을 만큼 깊은 무의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백강후는 미동도 없이 안락의자에 늘어진 선수들을 지켜보며 데이터 팀장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연습장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오직 선수들의 고른 숨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감각이 예민한 서한결이었다. 그는 안대를 벗으며 뻑뻑한 눈을 비볐다. 당연히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짙게 깔린 어둠과 연습장의 차가운 야간 조명뿐이었다.
"어... 뭐야. 지금 몇 시야?"
서한결의 중얼거림에 강건한과 유시영도 부스스 눈을 떴다.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지만 머릿속은 현실감이 없어 멍했다. 시계가 고장 난 건가 싶어 각자의 휴대폰을 확인하던 선수들의 손이 일제히 멈췄다.
하나둘 눈을 뜬 선수들은 경악했다.
밤 9시였다.
새벽 4시에 밥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꼬박 15시간을 세상과 단절된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이 당혹감 섞인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어둠 속에서 백강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제 좀 사람 꼴 같네."
백강후는 시계를 보지도 않고 타석을 가리켰다.
"잠든 동안 뇌가 쓰레기 데이터들은 다 버렸을 거다. 지금 네 몸에 남은 감각, 그게 진짜 네 스윙이다. 이제 다시 채를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