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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섬, 홀로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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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므 Nov 01. 2024

바람

창작지원작  『바다가 건넨 ㅁㅇ』 중

도둑 여행을 왔다. 별 계획 없이 훌쩍 바다 앞에 섰다. 바람이 쉬지 않는 장소다. 장마란 걸 알지만, 나는 얼굴에 닿는 이 짠 내 향긋한 바람이 그리웠다. 남편은 바다에 푹 몸을 담근 참이다. 나무 벤치에 몸을 늘어뜨린 나는 내 허벅지에 자기 몸을 딱 붙이고 있는 우리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강아지는 고개를 들어 파도를 보다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이내 졸린 눈을 하고 엎드린다. 두세 시간 남짓한 차 안에서의 시간이 고단했을 거다.

 

서핑은 하늘빛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보고 한다. 바람 마음에 달렸다. 바람이 파도 언덕을 어떻게 조각하느냐에 따라 재미도 달라진다. 다행히 오늘은 바람이 서핑을 허락했다. 남편이 서프보드에 몸을 얹고 팔을 채며 패들링을 시작한다. 회색빛 하늘 그 아래에 아슴아슴하게 쑥 빛 바다가 출렁댄다.

 

바다 위를 구르는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이 유독 바다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의 매력은 바다와 함께할 때 제대로 알 수 있다. 처음 서프보드를 강사가 밀어줬을 때 바람이 내 온몸을 훑었다. 내가 아는 바람의 감촉이 아니었다. 나를 공중으로 밀어내는 듯한 힘이 느껴졌다. 바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영화 ‘타이태닉’에서 잭이 로즈를 선두로 이끌어 양팔을 벌린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지도.

 

오늘은 바람이 제법 차다. 어깨에 걸쳤던 두꺼운 해변용 방풍 코트에 팔을 끼워 넣어 고쳐 입었다. 넘실, 울렁, 넘실, 울렁. 파도 그네 사이로 A가 애를 쓴다. 비가 오지 않는 대신 옥빛 파도가 흰 거품으로 해변에 오르려 한다. 오늘 이곳을 허락한 바람은 다행히 내게 매섭지 않다. 바다를 구경하는 게 좋다. 바다로 여행을 가는 날에는 꼭 파도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으로 담는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큰소리 내며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해진다. 내가 아는 바람이 내 귓불을 당긴다.

 

심술부리는 바람 덕에 사진은 물 건너간 날이 있었다.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바다를 찾아갔다. 큰바람이 집요하게 부는 날이었다. 바다 사진을 찍기는커녕 해변에서 멀찍이 있었는데도 얼굴 한가운데까지 머리카락이 침범했다. 미역 줄기가 붙듯이 내 눈, 코, 입, 뺨으로 마구 붙었다. 손으로 쓸어내리고 귀에 걸어도 자꾸 바람이 막았다. 끊임없이 충동질했다. 이곳에서만이라도 속이 시원해지라는 의미였을까. 울고 싶었던 나는 그 참에 눈 밖으로 물을 뺐다.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파도 방울까지 실어와 얼굴에 자꾸만 흩뿌렸다.

 

어떤 날은 바람이 고분고분하기도 했다. 내가 다가가도 파도만 자분거리며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바닷가 모래사장, 그중에서도 파도 부서지는 곳 아주 가까이에서 나는 쭈그리고 앉았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수평선 너머에 있었다. 바람이 잠잠한 틈을 타서 발등에 오르는 물결 사진을 찍었다. 파도가 살랑살랑 사르르, 뒤로 다가온 바람이 순하게 웃었다. 한결 어깨에 힘을 뺀 바람이었다. 모래밭에 글자를 아무렇게나 쓰며 나도 웃었다.

 

한편, 이놈이 아주 성이 날 때도 있었다. 태풍이라는 거대한 친구가 곁에 있을 때 마음껏 으스댔다. 비가 마구 쏟아지는 날 바다에 가면 우산을 써도 소용이 하나도 없다. 빗방울은 바람을 업고서 얼굴은 물론이고 내 등까지 사정없이 들이쳐댔다. 핸드폰 사진은 진작 포기, 물이 닿을까 봐 꺼내지도 않았다. 바람이 괴력을 발휘하는 그런 순간에는 우산을 접는 게 차라리 나았다. 내 몸에만 초점을 맞춘 듯이 바람이 무턱대고 빗방울을 뿌렸다. ‘나랑 싸우자!’라고 정식으로 말 붙여 온 건 아니니, 이런 날은 좀 져주고 싶어 진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겠지. 친구의 화풀이 푸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온몸이 꿉꿉해져도 어느 정도 참을만했다. 해변 끝 숙소에서 옷을 말리면 그만이었으니까.

 

여행은 바람을 맞는 일이다. 누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을 한다던데 나는 바람을 보려고 집을 떠난다. 이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이 좋다. 자동차 차창 멀리, 바다 꽁지가 보이는 순간부터 나는 창문을 내린다. 그 틈으로 바다 향을 머금은 바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앞 좌석으로 들이닥친다. 뒷좌석의 강아지는 코를 벌름거리며 밖을 궁금해한다. 오늘도 그렇게 이곳에 왔다.

 

지구상의 그 어느 곳보다 이곳, 바다 앞에서 이 존재는 지치지도 않게 매번 몸덩이를 바꿔낸다. 공기의 이동에 불과한 바람이건만, 방향을 지닌 채 움직이면 그 강도에 따라 온갖 사물이 반응한다. 귀여운 미풍이더라도 잠재된 힘은 엄청나다. 바람이 몸을 바꾸면 바다도 표정을 바꾼다. 이 특별한 존재를 만나는 일이 반갑다. 보이지 않게 우리 몸을 훑고 지나가고, 어떤 날은 다 드러내고 퍼붓는다. 몸을 힘 있게 공중으로 띄워 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도 같다.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아는 친구 같다.


이러한 변화무쌍함과 다채로움 때문일까. 바람은 어쩌면 삶 자체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친절하게도, 거칠게도 나를 대한다. 바람 앞에서 변덕스러운 삶을 떠올릴 수 있다. 오늘도 예기치 않은 바람을 만나 삶을 대하는 연습을 하러 왔다. 오늘도 바람이 만들어 내는 바다의 표정을 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낸다.

 

저 멀리 A는 바람이 만들어 낸 파도 슬로프를 몇 번이고 타고 있다. 강아지는 깨지 않고 내게 붙어서 여전히 잘 잔다. 나는 바다를 보며 오래된 친구 같은 바람을 맞는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게 다 있다. 여기 바다, 사랑, 강아지, 다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핸드폰을 꺼내 지금 순간을 사진으로 담는다. 그리고 나는 바닷바람 맞으며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않는다. 집 떠나 다른 곳에 왔으니 이곳의 바람을 즐길 뿐이다. 그저 시원하다.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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