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지원작 『바다가 건넨 ㅁㅇ』 중
우리 집 강아지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어느 바닷가에서든 장난감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A는 서핑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우리는 날씨가 좋고 파도가 좋은 날이면 바다로 간다.
A가 보드를 꺼낸다. 맑고 화창한 날에는 실내에 있기에 아깝다. 나도 강아지와 모래사장에서 콧바람을 맞는다. 얼굴이 크고 코가 짧은 단두종인 우리 강아지가 납작코를 킁킁, 고개를 분주히 놀리며 발동을 건다. A가 서프보드를 한 손으로 번쩍 들고 바다로 들어가면, 나와 강아지의 뺏고 던지기 놀이도 시작된다. 해변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장난감으로 삼을 수 있는 우리 강아지의 능력은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세찬 바닷바람에 부러져버린 큰 나뭇가지, 바다로부터 떠밀려왔을 스티로폼 부표, 어딘가로부터 끊어져 온 밧줄 등 쓸모가 없어진 모든 것이 물색 대상이다.
제일 신이 나서 가져오는 것은 빈 플라스틱 물병이다. 무게도 가볍고 입으로 꼭지를 살짝 물면 자기 딴에는 움직이기에도 제법 적당하게 느껴지나 보다. 내 발밑까지 가져와서는 몸뚱이를 야무지게 놀리며 어서 뺏어보라고 설레발을 친다. 큰 눈망울이 새초롬하게 움직이며 부산스럽다. 자기가 찾아낸 이 멋진 장난감을 어서 멀리 던져주기를 바라고 있다. 콧구멍을 벌렁대며 줄기차게 나와 눈을 맞춘다. 기대하는 눈빛으로 입으로 야무지게 물병을 물고 있다. 이 모습이 새삼스럽게 신기하다. 예전처럼 온갖 것을 함부로 씹거나 먹지 않으니 다행이다.
강아지가 이갈이 하던 때는 온갖 쇠붙이를 다 씹어 삼키곤 했다. 오밤중에 응급실로 달려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복부 엑스레이 사진 속 흐린 회색의 풍선처럼 보이는 위 안에는 거짓말처럼 낯선 것이 들어차 있었다. 얇은 체인-쇠사슬-이 뱃속 가운데에 다소곳이 모여 있었다. 설마 하며 졸린 눈을 비벼 봐도 진짜였다. 눈을 부릅떴다. 도대체 왜 삼켰던 걸까.
생명의 입은 생존을 담당한다. 이가 하나도 없는 아기도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고 다 입에 가져간다. 먹지 못하면 살지 못함을 본능적으로 아는 까닭이다. 함부로 입이 삼킨 체인은 생존과 거리가 멀었다. 어색한 위치에 자연스럽게 들어 있는 이 작은 이물질은 값이 비쌌다. 위를 세척하고 링거를 맞는 하룻밤에 오십만 원이 훌쩍 넘었다. 전기코드가 잘근잘근 씹혀있는 것을 목격했던 어떤 날도 있었다. 변을 샅샅이 뒤져서 이물질이 나온 것을 확인하고서야 두 발을 뻗었다. 소화될 수 없는 이물질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무모한 호기심의 비용을 비싸게 치른 탓에 우리 강아지는 무사했다.
모래 위에 덩그러니 있던, 미처 무사하지 못했던 동물의 모습이 머리에 스친다. 생태환경 사진작가인 크리스 조던의 작품이었다. 깃털이 분명 흰 빛이었을 큰 새 한 마리, 그 뱃속에 알록달록한 낯선 모양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뇌리에 그 모습이 생채기처럼 남았다. 작가 조던은 8년 동안 북태평양의 미드웨이섬에서 인위적인 조작 전혀 없이 자연 상태 그대로를 렌즈에 담았다고 했다. 이 새는 비행이 가능한 조류 중에 가장 커서 날개를 펴면 3~4m나 된다는 ‘앨버트로스’다. 이 진귀한 동물은 어째서 예쁜 쓰레기를 먹게 된 걸까. 가장 큰 날개로 하늘을 누비는 앨버트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높이, 그리고 아주 멀리까지 날 수 있다던데. 병뚜껑이 보석처럼 예뻐서 삼켰을까. 자기 숨이 끊어지는 줄도 모르고.
숨이 멎은 후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서 새의 육신은 말라갔을 거다. 아직은 깃털과 뼈가 남아 있어서 몸의 형체를 온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내장기관은 이미 풍화되어 흔적도 없는데, 그곳에 찬연한 색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누군가 작정하고서 죽은 새의 배 위에 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 쌓아 둔 것만 같았다. 이렇게나 많이, 함부로 삼킨 것이 너의 숨을 끊어놓았구나.
눈앞에서 파도는 자꾸만 깨진다. 강아지는 빈 플라스틱 물병을 가져와서 내게 재차 문대며 다시 던져달라고 난리다. 못 잡겠다는 척을 하다가 재빨리 물병을 낚아챈다. 어깨로 큰 반원을 그리며 최대한 멀리 던져본다. 물병이 먼 곳에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강아지는 로켓 발사되듯 목표물로 튀어간다.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우리 강아지는 잘 살아 있다.
태평양 창공에서 그 지구의 그 어느 동물보다도 높은 곳에서 가장 큰 날갯짓을 하며 활공을 하던 이 앨버트로스는 숨의 마지막에 이르러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동물은 생명 넘치게 움직여서 동물이다. 모든 생명은 숨을 잃자마자 이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리는 그 몸뚱이 때문에 죽는다. 생명의 기운을 잃고 스러져가는 광경은 여간해서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말할 수 없으니 눈을 부지런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강아지가 제 얼굴에 무게중심을 두고 궁둥이로 춤을 추며 내게 달려온다. 부지런히 내 눈을 찾아 맞추며 시선으로 말한다. 입에는 다시 플라스틱 물병이다. 그러고 보니 이 물병의 뚜껑은 어느 곳에 외따로 있는 것일까. 그 뚜껑은 태평양에 있는 미드웨이섬까지 가서, 높게 하늘을 날던 앨버트로스의 눈을 사로잡았을까. 기어이 그 멋진 새의 목구멍으로 넘겨져 그 뱃속에 색깔 하나를 더했을까. 아니면 파도와 물결에 점점 잘게 부수어져 바다 깊숙이 사는 심해어의 아가미로 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전설처럼 들려오는, 바다 한가운데 둥둥 떠 있다는 플라스틱 섬에 도착했을까. 북태평양 환류에 존재한다는, 우리나라의 열네 배 크기라는 거대한 쓰레기 섬 말이다. 아니면 적도 지방에 이르러 작열하는 태양을 따라 하늘의 구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뱃속이 거북해진 먹구름이 북극에 도착해서는 눈으로 뱉어놓았을까.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북극의 눈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다량 발견되었다던데. 영하 50도로 내려간다는 그곳의 북극곰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알록달록한 눈을 맞고 있으려나. 상상할 수 없는 영하의 온도만큼이나 피부에 와닿지 않는 서늘한 상상이다.
다시 병뚜껑 없는 물병이 내 품으로 직진해 온다. 서핑을 끝낸 남편이 모래사장으로 걸어 나온다. 강아지가 물병을 툭 떨어뜨린다. 이제 다 놀았다. 이국의 바다를 여행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르는 이 병이 만약 유리병이었다면, 또 그 안에 낯선 언어로 쓰인 편지까지 있었다면 꽤 낭만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영영 사라지지도 않은 운명이니 우리의 만남은 더 비극일까, 플라스틱이 썩으려면 백 년까지도 간다는데. 내가 생각 없이 마신 물 한 병, 내 육신이 풍화되고 나서도 길이길이 장수할지도 모르겠다. 한낱 인간으로서 목이 탄다. 지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생명인지, 내 숨통을 끊는 죽음인지 모르는 것은 인간도 매한가지다. 우리 편해지자고, 지구 위 다른 생명이 비싼 값을 치르고 있다. 뱃속에 이물질을 잔뜩 품은 새가 높은 곳으로부터 활공하며 내려와 발을 디뎠을 드넓은 태평양, 새의 마지막 순간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A는 보드를 들고, 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손에 들고, 강아지는 연신 코를 벌렁거리며 해변을 걷는다. 귀여운 우리 강아지의 얼굴 너머에, 여전히 병뚜껑을 먹는 커다란 새와 색색의 눈을 맞는 북극곰이 일렁댄다. 아직 막이 내리진 않았다. 우선 플라스틱 수거함을 찾아야 한다. 바다는 오롯이 생명만 삼키길 바란다. 나 하나, 지금 여기부터 시작이다. 동물의 위장은 생명을 살리는 먹거리로 들어차야 하고, 생명이 스러진 새의 몸은 온전히 흙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하얀 북극곰은 얼어붙은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인 채 흰 눈을 맞아야 한다. 평범하고도 당연한 풍경……, 발에 닿는 모래알이 유난히 깔끄럽다. 비극을 희극으로 탈바꿈시킬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