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가 이해되는 나이가 되어가고있다.
결코 오래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30대가 되면서 20대 초중반 때와는 사뭇 다른 사고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다. 한마디로 ‘내가 꼰대인가’ 싶은 순간들이 있는 거다. 20대 초중반에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을 많이 했다면, 지금은 현실적이고 안전한 생각을 많이 한달까.주로 나보다 어린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갑작스레 그 사실을 깨닫곤 한다.
일전에 어떤 무리 속에서 나보다 조금 어린 여자의 결혼관을 살짝 엿보게 될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호텔결혼식이 아니면 안하겠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더 어린 여자는 스몰웨딩을 하고싶다고 했다. 분명 나도 몇 해 전까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말을 들으면 머릿속으로 '어리니까 그렇지. 나이 들어봐라, 그냥 평범한 결혼식장 찾게 될 걸'하고 생각한다. 어린 그녀들에게 결혼은 아직 공상이 가능한 먼 나라 이야기지만, 나에겐 결혼이 당장의 현실이기 때문일까.
빠듯한 형편에 식대가 1인에 15만원은 훌쩍 넘는 비싼 호텔결혼식을 부르짖을 수 없고, 부모님과 일가친척의 행사이기도 한 결혼식을 우리만 즐겁자고 스몰웨딩으로 할 수도 없는 게, 서른, 혼기가 찬 꼰대언니의 현실인 모양이다. 음, 나도 한 때는 영화 <어바웃 타임>을 보며, 가까운 지인들만 모아놓고 소박한 축제처럼 결혼하고 싶었다. 하품이나 나오는 주례니 뭐니 다 빼 버리고, 하객들과 소통하며, 노래 부르고 춤추고, 느릿하게, 완전히 우리만의 시간으로 결혼식을 채우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목전에 결혼을 앞둔 지금은 왠지 나 자신보다는 ‘주변’과 ‘돈’이라는 현실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르신들이 우리만의 유별난 결혼식을 이해하실까? 스몰웨딩으로 하면 축의금은 어떻게 충당하지?같은 생각. 이는 결혼식뿐이 아니다. 집에 대한, 직업에 대한, 이성에 대한, 하다못해 무슨 옷을 살까에 대한 생각마저도 폭넓은 상상과 낭만보다는 현실과 안정 쪽으로 사고가 기운다. 아마 나이가 들고 있다는 방증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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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나도 많은 꼰대를 만났었다. 나보다 몇 해라도 더 살아본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늘 틀에 박히고 재미없는 소리를 조언이랍시고 해댔고, 당시엔 그게 얼마나 촌스러운 소리로 들렸는지 모른다. 낭만으로 가득 찬 내 영혼에 똥칠을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점점 내가 그들의 나이가 되어가면서, 그때 그 꼰대들의 그 뻔한 조언들이 실은 자신의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절대 무시할만한 것들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됐다.
그들도 과거에는 찬란한 상상과 낭만에 물들이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조금씩 낭만이 부서지고 쌉쌀한 현실을 경험했겠지. 상상과는 달리 공장에서 뽑아져 나오는 듯한 결혼식을 치르고, 특별할 것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시원하게 사표를 쓰고 자유를 찾는 직원이 아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 직원을 모토로 삼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열정이나 낭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살아보니 그것이 가장 ‘안전’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었을 거다. 낭만은 매력적인 대신 늘 큰 위험부담을 요구하지만, 낭만을 조금만 포기하면 확실한 안전이 담보되니까.
나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한때 같잖게 생각했던 그 꼰대들의 노선을 그대로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여자친구와 결혼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이제 스무 살밖에 안된 순수한 남학생에게 “헤어지면 죽을 것 같지? 근데 걔랑 헤어지고 앞으로 서너 명은 거뜬히 만나게 될 거야”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조언을 건네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태도를 취하는 내 마음에는, 낭만만을 믿은 결과 항상 열패감이 뒤따랐던 후회의 경험이 깔려있다.
절대 영혼 잃은 꼰대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이런 저런 현실의 때로 물드는 와중에도, 나는 아직 마음속 한 편에 '철딱서니' 소리를 들을만한 나만의 낭만과 공상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낭만을 현실로 승화시키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하고 있다. 동시에 꼭 꼰대들이 하는 말이 낭만과 순수에 위배되는 절대 악은 아니며, 한 번쯤은 새겨들을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들의 그 뻔해터진 말들의 기저에는 우회하지 말고 쉽게 선택하길 바라는, 꼰대들의 염원이 담겨있을 때가 많으니까.
낭만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사랑과 몽상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었을까?아니. 우리는 현실과 낭만이 상충할 때 오히려 확실한 삶의 좌표를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2019 일상의짧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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