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나이든 할아버지가 알려주는 인생의 지혜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인턴(Intern). 나는 최근(2020년 여름)에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개봉 당시 예고편을 잠깐 봤을 땐, 그저 노인의 나이에 인턴을 하게 된 할아버지의 좌충우돌 직장생활 스토리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역시 예고편은, 영화의 본질을 다 담지 못한다. 그만큼 영화가 의외였고, 좋았다는 얘기다.
이 영화는 나에게 두 가지 관점에서 큰 감동을 주었다. 자신의 커리어를 사랑하는 여자의 관점, 묵직한 노년의 품격을 보여주는 할아버지의 관점. 영화는 이 두 캐릭터의 관점을 모두 담고 있다. 모두 내가 동경할만한 캐릭터여서 였을지, 두 인물이 그려내는 서사는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주인공은 비교적 젊은 여성인 쥴스(앤 해서웨이), 그리고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벤(로버트 드니로)이다. 영화를 보기 전엔 둘 다 인턴인 줄 알았건만, 예상과는 달리 쥴스는 회사의 대표이고, 할아버지 벤이 인턴이었다.
퇴직을 한 뒤 어떻게 하면 무료하지 않고 의미 있게 삶을 보낼까 생각하던 벤에게, 쥴스의 회사에서 추진한 '노년 인턴십' 기회가 눈에 띈다. 벤은 그렇게 쥴스의 인터넷 쇼핑몰 회사에 노년 인턴이 된다. 하지만 바빠도 너무 바쁜 회사의 대표 쥴스는, 자신이 그런 인턴십 프로그램에 동의했다는 사실조차 기억을 못 하고, 뜻하지 않게 자신에게 배치된 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는데. 쥴스 피셜, "노인이 어려워서"다.
하지만 벤은, 젊은이가 대표인 회사에 나이 지긋한 자신이 '인턴'으로 와있다는 사실에도, 그리고 그 대표가 자신을 꺼리는 듯한 내색을 내비쳐도, 그에 전혀 굴하지 않는 신사다. 세상에 이런 할아버지가 많았더라면 세상이 참 밝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벤의, 지적이고 신사적이면서도, 나이 듦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이나 피해의식이 없는 태도는, 곧 쥴스의 꼿꼿하던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한다. 벤은 쥴스의 비서로서, 그녀가 내뱉는 사적인 내용들에 귀를 닫을 줄 알고, 그녀가 원치 않는 의문을 갖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대표로서 쥴스가 자신의 회사에 가지는 열정과 긍지를 존중해줄 줄 아는 진정한 어른이었던 것. 시간이 지나며 쥴스는 그저 '노인(=꼰대)'이라 치부했던 벤에게 마음을 열고, 기대고, 의지하게 된다. 젊은 대표와 나이 든 인턴의 우정이라니 무지 흐뭇한 소재였다.
그리고 이 영화가 표방하는, 여성의 '커리어'에 대한 무한한 격려가 너무도 맘에 들었다. 영화 속에서 쥴스는, 창업 9개월 만에 직원 220명을 거느리게 된 여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급격하게 성장한 만큼, 몸뚱이가 커진 회사는 자신 혼자 감당하기가 버겁다. 그래서 쥴스는 전문경영인(CEO)에게 회사를 맡기고 자신은 일선에서 조금 물러나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는 쥴스의 바람이었다기보다는, 가족(특히 남편)과 멀어지는 듯한 느낌 때문에 결정한 부분이 컸는데. 즉 여성 대표로서, 일에 충실하고 가족에 소홀해질지, 가족에 충실하고 일에 소홀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
동방예의지국도 아니건만, 서양의 여성 대표 쥴스도 그런 고전적인 딜레마에 빠져 계속해서 고민을 한다. 하지만 50:50이었던 이 고민은, 쥴스의 남편이 결국 바람을 피우면서 결정적으로 '가족에 충실하자'는 쪽으로 기울고야 만다. 그녀는 자신이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족에 소홀했다며, 남편의 바람 또한 자신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렇게 전문경영인(CEO)을 고용하기로 한 그녀의 선택에, 직접적 이해와 직결되지 않는 다른 직원들은 큰 반기를 들지 않는다. 뭐, 대표가 꼭 그녀가 아니어도 회사는 굴러가니까.
하지만 딱 한 사람. 그녀의 인턴인 할아버지 벤은, 그녀의 이런 결정을 아쉬워한다. 전문경영인 고용을 두고, 쥴스에게 벤이 하는 말은 이러하다.
"1년 반 전에 혼자 창업해서 직원 220명의 회사로 키운 게 누군지 잊지 말아요."
이런 말을 해줄 어른. 이런 어른이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일까. 나의 열정과 포부를 알아봐 주고, 그것이 가족만큼이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해 줄 사람. "거 봐, 여자가 바깥일에 몰두하니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가 아니라 "남편의 불륜이 두려워 자신이 가꾸어낸 성공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지 말아요"라고 말해주는 어른을 곁에 둔다는 건, 아마 인생의 몇 없는 인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문득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맞아, 우리 엄마도 저런 사람이지. "여자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첫 번째 덕목이지..."같은 이야기로 딸의 미래를 재단하지 않았던 내 인생 가장 큰 어른. 물론 나는 쥴스처럼 빛나는 회사의 대표는 아니지만, 엄마는 글을 쓰는 나를 항상 칭찬했고 내가 잘될 거라고 응원해주었으니까. 내가 결혼이나 육아라는 선택 때문에 내 꿈을 접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엄마는 내게 아이를 최대한 천천히 가지라고 말하는 중이다)
때때로 인생에는 그런 '은인' 같은 인연이 다녀가곤 한다. 쥴스의 인생에는 벤이 그랬을까. 나이를 초월한 우정, 살아온 시대가 전혀 다름에도 서로에게 전할 수 있는 격려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나도 노인에 대한 약간의 어려움이 있는 사람인지라. 하지만 벤 같은 어른이 내 주위에 있다면 참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멘토를 만날 수 있다면 분명 삶은 더 윤택해지겠지. 그런 생각으로, 보는 내내 마음이 참 따뜻했던 영화다.
CEO를 고용하지 않고 결국 자신이 계속해서 회사를 보살피기로 결정한 쥴스는,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벤을 찾아간다. 늘 느티나무처럼 자신의 평온을 유지하며 타인에게 배려를 건넬 줄 알던 그 어른은, 그 시점에 들판에서 요가를 하고 있다. (참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쥴스는 아이처럼 그 사실을 벤에게 자랑하기 위해 말을 걸지만, 이미 쥴스의 결정, 즉 그녀가 회사를 지키기로 했을 것임을 알고 있는 벤은, 조용히 그녀에게 함께 요가를 할 것을 권한다. (생뚱맞지만 흐뭇한 장면이라 생각했다)
쥴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벤의 곁에 서서 요가 동작을 따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두 사람이 영원히 우정을 유지했을지, 과연 벤은 인턴에서 벗어나 더 큰 요직을 이어받았을지 그건 알 수 없는 부분. 하지만 그 엔딩씬 덕에 영화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하고 영원하지 않고를 떠나, 그저 그 순간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도 진실됐음이 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관계는 순간으로 영원하기도 하며, 찰나로도 인생에 긴 영향을 끼친다. 인연이란, 그래서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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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매우 주관적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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