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에 몰린 두 명의 영혼

나를 쫓아내려는 회사에 모른 척 다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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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서 일한 지 딱 1년이 지났다. 어떤 곳에서 1년을 보냈다는 것은 참 많은 것을 의미할 테다. 그곳의 사람들과 좋든 싫든 사계절을 겪었으며, 1년을 반복한 만큼 업무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숙달이 되었고, 무엇보다 내 마음과 몸이 그곳에 찰싹 달라붙어 그곳을 내 터전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매일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착실하게 일어나 출근도장을 찍고 해야 할 일들을 척척 해내고 오는 걸 보면, 사업주들이 그토록 입이 닳게 말하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나도 슬며시 발을 얹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나는 엄연히 여기서 몇 계절을 더 보낼 생각으로 임하고 있었는데. 엊그젠가 제일 친한 동료 언니로부터 가히 충격적인 이야길 듣게 됐다. "팀장님이 그랬다더라. 물갈이 좀 했음 좋겠다고. 꼬투리 하나 잡아서 내보내라고 했다나 봐" 꽤나 직설적인 단어, 물갈이. 그 물갈이의 대상은 언니와 나였다. 근무한 지 1년이 넘은 사람들이자 나이도 제일 많은, 이 곳 데스크의 터줏대감인 우리 둘.


글을 써서 대박이 나기 전까진 여기에 붙어있어야지, 했던 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뇌 지진이 일어났다. 아, 어떡하지 너무 짜증 나! 여기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설움 때문이 아니라, 내 인생계획이 전반적으로 틀어져버린다는 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팀장이 우리를 내보내야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당신이 아닌 이상 우리가 정확히 알 수야 없겠지만, 대충 추측해보자면 이런 몇 가지 사유가 꼽힌다. 첫째, 이직률이 매우 높은 이곳에서 1년이나 버틴 나와 동료 언니는 지독한 사람들이다. 둘째, 그것은 윗사람이 더 이상 막 부리기 어려운 존재들이란 뜻도 된다. 셋째, 우리가 더 오래 일하면 일할수록 연차일수나 퇴직금 등 챙겨줘야 할 것만 더 늘어난다.


늘어놓고 보니 세 가지 사유도 꽤나 굵직하다. 아니 그래도 말이지, 팀장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계산적이고 정 없는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내칠 계획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정녕 몰랐는데. 충격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언니, 그냥 우리가 관둘까요?" 나는 미움받으면서까지 여기서 일해야 되나 싶어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이것저것 현실적인 문제 앞에 냉정할 수밖에 없던 언니는 말한다. "아니. 우리가 왜? 우리가 먼저 관두면 실업급여도 못 받는데. 가만히 있어."


맞다. 이제 상심했다고 확 직장을 때려치울 나이는 아니다. 언니는 사십 대, 나는 삼십 대. 주기적으로 통장에 성실히 꽂히는 월급과, 책임져야 할 가족을 생각하면 퇴사는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럽고 치사해도 꿋꿋이 버티며 직장을 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언니의 차분한 설득으로, 나는 당장 구직 어플을 켜 새 직장을 알아보려던 동동거리는 마음을 접었다. 그래 냉정해지자. 여기는 틈틈이 쉬는 시간이 있어 사이사이 글도 쓸 수 있고, 월급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생활할 만한 금액은 되잖아? 게다가 언니랑 나는 이제 왕고라서 누구 눈치 볼 필요도 없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런 삼박자가 맞아 돌아가는 직장을,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팀장의 미움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매우 치기 어린 일이다. 정 원하면 그가 나를 자를 테지. 실업급여 주기 싫어서 직접 자르진 못하고 자발적으로 관두게 만들려는 지독한 팀장에게, 구태여 우리가 좋은 일을 만들어 줄 이유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두 영혼. (사진출처:핀터레스트)


그리하여 나와 언니는, 언제든 잘릴 목숨에 처해있지만 모른 척 이 곳을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어 매일 출근을 하게 됐다. 어차피 실직을 할 거라면 잘리자는 생각으로. 회사를 위해 1년이나 열심히 일을 했는데 돌아오는 게 우리를 내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라니, 괘씸해서라도 꼭 실업급여는 챙겨야겠다.



아. 삶이 순탄치 않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싶을 때가 있다. 이번이 그렇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기라는 돌덩어리가 날아와 항거불능인 상태의 나를 저격한다. 나는 아무 방어자세도 취하지 못했으니 돌덩이를 맞고 피를 흘리는 수밖에.


같은 시간, 마음이 야들야들한 동료 언니는 팀장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에 더 큰 상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사실 나는 언니보다 계산적인 애인진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팀장의 미움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단 프로계획러인 나의 인생 계획이 한 변수로 인해 틀어진다는 것에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미움받는 일에 나보다 익숙하지 않은 언니의 미간에서 좀처럼 내천(川) 자가 지워지질 않는다. 나와는 다른 증상이지만, 어쨌든 여기도 응급환자 속출이다.




우리는 결국 이 일로 분을 삭이지 못해, 야탑역에서 만나 순대볶음에 술 한 잔을 기울였다. 팀장 욕으로 시작해 신세한탄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렇게라도 부정적인 기운을 몸 밖으로 빼내야 할 것 같았다. 두서없는 대화 끝에 얻은 결론은 딱 하나, 언니와 내가 살 길은 그저 '모른 척하고 다니기'라는 것이었다. 뻔뻔하게 다니다가 잘리면 실업급여라도 받을 수 있으니 땡큐요, 우리를 자르지 못해 계속 다닐 수 있으면 더 땡큐요, 하는 심산으로 말이다.


직장 노동 인생 10년. 직장에서 겪어볼 일은 이제 다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난생처음 겪는 일이 튀어나온다.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먼 걸까. 언제 잘릴지 모르는 채로 출근을 하는 마음은 참으로 헛헛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다시 새로운 직장에 가서 적응해 나갈 생각을 하니 그것도 새롭긴 커녕 아득하기만 하고. 나는 그저 안정되고 싶을 뿐인데, 정착하고 싶을 뿐인데. 정말 그뿐인데...


얼마나 여기서 더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달일지, 내일일지 모를 퇴사일을 받아놓고 기약 없는 출근이 이어지고 있다.


"듬지야 알겠지? 절대 우리 발로 나가진 말자!"


언니와의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해당 글은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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