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는 말자구요!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별다른 이유가 없는데 짜증이 난다면, 어김없이 PMS(premenstrual syndrome), 월경전증후군이다. 출근해서 조금 바쁘기야 했지만 별다른 사건이 없었는데도 뭔가가 짜증나고 초조하기에, 혹시나 싶어서 생리달력 어플을 봤다. 역시나 그날이 오기 딱 3일 전이었다.
그리하여 오늘은, 매우 합당한 이유로 다이어트도 내팽개치고 기름지고 달콤한 디저트를 용인한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달다구리 음료까지 두 잔씩이나 흡입했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의 몸이란 한 치도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구나 싶다.
그건 그렇고. 내 몸이야 혈당 수치가 올라가든 살이 찌든 괜찮지만, 월경전증후군이 유발하는 먹구름이 내 주변인에게도 영향을 미치니 그게 참 문제다. 나의 얼토당토않은 짜증을 봐야 하는 내 사람들. 가깝게는 남편부터 멀게는 그날 함께하는 지인들 또는 직장동료까지. 아무 잘못 없이 내 짜증을 겪어야 하는 그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게 단점이다.
오늘의 타겟은 동료 언니였다. 안 그래도 기분이 꾸리꾸리 한데, 언니가 자꾸 다음 달 휴무를 짜자고 (데스크는 휴무를 다섯 명이서 골고루 근무할 수 있게끔 짜느라 언제나 머리가 터진다) 독촉하여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다. 언니는 언젠가는 해야 하는 문제이니 빨리 해치우자는 마음이고, 이 마음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 단지 자연적 '성격파탄의 주기'에 돌입한 나와 함께인 게 잘못이지.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잔뜩 섞어 이야기했고, 언니는 티는 안내지만 내 짜증을 감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유순한 성격상 조용히 상처로 받아들이겠지. 평소 둘도 없이 의지하고 지내는 동료사이라지만, 나이로는 내가 한참 아래인데 내심 얼마나 버릇없게 느껴졌을까.
알다시피 인간관계란, 이런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바로 사과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때가 많다. 알아서 이해해주겠지, 잊어버리겠지, 은근히 상대에게 기대하면서 기회는 점점 물 건너가는 것이다. 역시나 사과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혼자 아인슈페너를 마시러 왔다가 곧바로 고민에 휩싸였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아무리 생리 전이라도 그렇지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건데.'
나는 겉보기엔 정말 조심성 많고 순한 사람이지만, 친해지면 고삐를 풀고 대범해지는 성격이다. 그래서 나 같은 이런 유형들은 낯선 이에게는 평판이 좋고, 되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까칠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음, 어떻게 봐도 좋은 성격은 절대 아니다.
친해졌다고 해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다. 아니, 되려 더 조심하고 존중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친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격의 없이 지내는 동료 언니에게 오늘도 난 본의 아니게 성질을 내버렸으니. 난 정말 왜 이리 친한 사람들에게 더 못나게 구는 걸까, 나 스스로가 미워진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남편. 내가 포악하다는 걸 제일 잘 아는 0.1cm 거리의 사람. 엄마. 삼십 년 평생 딸의 까칠함을 받아와 준 1cm 거리의 사람. 그리고 친구들과 친한 동료 언니. 10cm 거리쯤은 되기에 그래도 가족보다는 조금 더 의식하고 신경 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허물어져 내 난폭함을 들키고야 마는 사람들.
가까운 이들에게 제일 잘해야지 싶으면서도 난 그게 늘 너무나 어렵다. 낮선이 에게는 사과도 척척 잘하면서 친한 이들에게는 미안하다는 소리 한번 하기가 그리 어렵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내 성격을 고치고, 아니 고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제때 사과는 전할 줄 아는 양심 있는 친구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 모난 성격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잃는 일은 안 만들 테니까.
내일은 동료 언니와 모처럼 술 한 잔을 하기로 했는데, 오늘 나 때문에 기분 상한 언니가 돌연 약속을 취소해버리는 건 아닌지, 아님 영영 나를 자신의 친구 리스트에서 끊어내 버리는 건 아닌지, 뒤늦게 후회하느라 오후 내내 머리가 어지럽다.
달디 단 아인슈페너 한잔도 비웠으니, 내 자궁아 이제 그만 좀 난동 피우자! 더 늦기 전에 어서 가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해당 글은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