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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를 위한 첫 번째 걸음, 퇴사.

무조건적인 존버가 답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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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육체도 정신도 아프게 된 어느 겨울날. 나는 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애초 2년은 채우자던 곳이었지만, 멘탈이 호두껍질처럼 부스러져 가고 있던 터라 회사의 사정 같은 걸 고려해줄 여력이 없었다. 의외로 퇴사는 쉽게 이루어졌다.

퇴사를 하면서 으뜸으로 좋은 점은 단연, 어깨를 짓누르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보다 글을 쓸 시간이 늘어난다는 점이 간발의 차이로 밀린 '둘째로' 좋은 점이다. 물론 퇴사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어디 퇴사에 장점만 있겠는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곧, 경제적 박탈을 의미할 터다.


맞벌이가 아니면 힘든 세상에 와이프 된 자가 너무 힘들어 일을 관두겠다고 하면, 남편 된 자의 타당한 반응은 아마도 "자기 힘든 거 알지, 하지만 우리 외벌이로는 힘들잖아" 정도가 되려나. 전에 몇 차례 힘들어 관두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나의 남편도 그 비스무리한 반응이었다. 제 영혼의 반쪽이 힘들다는데 안쓰러우면서도, 집 한 칸 제 명의로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부부에게 외벌이란 쉬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두겠다고 매일같이 남편 귀에 피가 날 때까지 외쳐댄 탓일까. 이제는 정말로 견딜 수 없어 관두겠노라고 했을 때, 남편은 그런 나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런 그가 미안하고도 고마웠던 나는 굳건히 맹세했다. 정말 열심히 글을 쓰겠노라고, 단편소설부터 장편소설까지 무엇이든 써내겠노라고. 더 이상의 직장 노동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최소한의 경제적 보탬, 아니 희망은 되고 싶었다. 기왕이면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꼭 성공하리라고. 물론 나는 아직까지 글로써 그럴듯한 수익을 내 본 적이 없었지만 남편은, 그런 내 밑도 끝도 없는 포부를 고맙게도 믿어주었다.


퇴사가 도약을 위한 첫 걸음이길.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백화점은 내가 다녀본 그 어느 직장보다도 힘든 곳이었다. 유유자적히 흐르던 기존의 사무직종과는 달리 매일매일이 전쟁터 같았고, 그곳에서 나는 한 손에는 총검을 한 손에는 수류탄을 든 채 아둥거리는 뜨내기 병사 같았다. 여전히 내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여전히 이 전쟁이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야 했던 시간들.


아니다 싶은 건 과감히 내려놓고 새 지도를 펼치자는 게 내 인생 지론이다. 고로, 나는 '존버는 승리한다'라는 슬로건을 잠시 비껴가기로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곳에서 존버 하는 것은 인생의 낭비'라는 새 슬로건을 대문에 내세우면서.


일단 나의 가족인 남편과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남은 숙제는, 퇴사하는 날까지 직장에서 잘 마무리하고 나오기다. 떠나는 자를 누가 예뻐하겠냐마는, 그렇다고 불성실로 임하고 싶지는 않다. 다행히도 그럭저럭 마지막까지 별 탈 없이 일하다 나올 수는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관두면 애기 가질 거야?"라고 묻는 직장 동료들에게는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끝끝내 내가 글을 쓴다고 이야기하지 못했기에, 아마도 모두 내가 그만둔 후 조금 쉬다가 바로 임신을 하려는 줄로 아는 눈치다. 사실 내 삶의 계획엔 아직 아기의 '아'자도 없는데 말이다. 내가 화목한 가정보다 자아 성취에 골몰한 의외의 성향이라는 걸 알면,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한 가지 신기했던 건 회사에 '두 번째로' 관두겠다고 말하니, 다들 처음보다는 덜 격앙된 반응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각은 자주 했지만 나름 꽤 성실한 편이었고, 결혼한 생계형 유부녀였기에 아마 몇 년은 거뜬히 다닐 거라 생각했을 거다. 그런 내가 맨 처음 관두겠다고 했을 때 거의 경기를 일으키던 동료 언니와 의아해하던 주변인들의 반응이 생생하다. 그러나 이것도 두 번째가 되니 아무도 놀라 하지 않는다.


한 번의 언질이, 그들에게 일종의 이별연습을 시켜준 셈일까. 아, 듬지도 언젠가 관둘 수 있겠구나, 하는 떡밥을 주는 것이 이렇게 퇴사에 있어 편리할 줄이야. 더 다니라던 팀장은, 내가 두 번째로 관두겠다고 하니 덤덤히 "알겠다"라고 했고, 밤낮으로 관두지 말라고 종용하며 난리를 치던 동료 K언니도,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래, 자기 힘들어했잖아..." 하며 꽤 안정된 반응을 보여왔다. 붙잡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내가 꿈꾸던 편안한 이별이다.


고로, Dobby is free. 나는 자유다.



끝은 새로운 시작.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속전속결로 결정된 퇴사 이후, 이제 남은 내 삶을 계획하는 것이 남아있다. 퇴사 후 인생을 낭비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기약 없이 쉬면서 남편에게 손을 벌릴 생각도 없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비현실적인 문학도처럼 글에 심취해있을 생각도 전혀 없다. 구체적인 계획을 짜야할 것이다. 새로운 판과 그에 맞는 현실적인 세부 계획들. 다시는 같은 실수─일도 꿈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를 반복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쉼'을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만들 수 있도록.


어서 2020년이 끝났으면 좋겠다. 어서 퇴사를 해서 새로운 판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 보고 싶다. 퇴사일과 함께 서른한 살이 더디게, 카운트되고 있다.






2021 일상의짧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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