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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맛이 갔다

[정사각형] 02(1).jpg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눈이 보기를 포기하는 거예요"


며칠 전 안경점에서 시력검사를 하다가 들은 얘기다. 글을 쓴답시고 하루 종일 노트북 모니터를 10시간 이상 쳐다본 결과 위의 말 그대로, 나의 눈이, 보기를 포기하셨다.


뭐, 원래도 그렇게 시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었다. 그래도 양쪽이 0.5 정도는 되었고, 살면서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안경 없이도 바깥활동을 잘만 하고 다녔던 나였는데. 평소 영화관에서 자막을 볼 때나 집에서 티브이를 볼 때가 아니면 안경을 써야 할 필요를 굳이 느끼지 못했었고, 사실 조금 덜 선명하게 보이는 세상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안경이나 렌즈를 끼고 나면 보이는 타인의 잡티나 모공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리고 교정시력도 1.0 정도는 거뜬히 나와줬었는데.


최근 한 달, 갑자기 눈이 불편했다. 잘 안 보이는 건 둘째치고 눈이 불편해서 기분이 안 좋아지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평소 두 시간쯤은 휴식 없이 글을 쓰는데 무리가 없었는데, 요새는 10분만 노트북을 쳐다봐도 어질어질하고 어쩔 땐 글자가 3개 정도로 겹쳐 보이기도 했다. 지속되는 불편함에 안 되겠다 싶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지 대략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귀차니즘을 떨쳐내고 간신히 안경점을 찾았다.


사실은 안과부터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세상에 눈이 불편한 사람이 평일 낮에 그렇게 많은지는 또 처음 알았다. 두 시간을 대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내향인들은 알 것이다. 외출을 했으면 무라도 뽑아야 하는 그 마음을. 오늘 당장 이 불편함을 해결하지 않으면 내년으로 미뤄질 것 같아 근처 안경점으로 직행했다.


안경점에는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나의 엄청난 호소와 함께 엄청난 검사가 이루어졌다. 뭘 봐도 사물이 겹쳐 보이고 흐릿하고 눈이 아린 복잡한 증상 탓일까. 평소 5분이면 끝날 시력검사를 거짓말 안 하고 20분은 족히 잡아먹은 것 같다. 직원분께 너무 죄송했다. 복구가 어려운 하드에서 마지막 사진까지 싹싹 찾아내는 자세로 열심히 임해주신 덕에, 어쩐지 내 미안함이 더 가중됐다.


아무튼 복잡한 검사 끝에 나온 나의 눈 진단. 심각한 난시가 있다는 진단과 더불어, 교정을 해도 시력이 0.6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는, 마치 '수술을 해도 살 수 있을지 장담 못합니다'와 같은 무서운 말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 외에도 생각나는 말은, 너무 가까이서 오래 모니터를 본 탓에 눈이 경직되어있고, 그중 왼쪽 눈은 거의 눈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 등이 있었던 것 같다. "눈이 보기를 포기하는 거예요"라는 말도 그때 나왔다. 더불어 모니터를 안 보는 게 제일 좋은데 꼭 봐야 하는 직업이냐는 직원분의 조심스러운 질문도 이어졌다. 덕분에 글쓰기를 포기한 내 삶을 잠깐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상상이 잘 되지는 않았다.


나는 원래 뭘 하든 비용면에서 최대한 절약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물론 먹는 거 빼고), 그 날 안경점에서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가격 상관없이 좋은 거 다 넣어주세요"


살면서 이렇게 멋진 말을 안경점에서 하게 될 줄이야.



시력. 있을 때 챙깁시다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사실 지금껏 안경으로 5만 원 이상 써본 적 없는 나였다. 그래도 이번엔 한 20만 원쯤은 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직원분은 가격 면에서도 합리적인 안경알을 추천해주셨다. 덕분에 전자파를 차단하면서도 색감의 차이는 그렇게 나지 않는 최적의 안경을 맞출 수 있었다. 게다가 안경값은 경기도민 앞으로 나온 재난지원금으로 남편이 결제해주었다. 착한 내 남편... 난 내 앞으로 들어온 재난지원금 10만 원을 이미 밖에서 밥 먹고 카페 가느라 다 쓴 지 오래였는데.




노트북이 없던 시절. 글을 쓰던 이들은 모두 연필로 글을 썼겠지? 그보다 더 옛날엔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썼을 테고 말이다. 노트북이라는 게 세상에 보급되면서 보다 빨리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왔지만, 역시나 디지털 문명은 사람에게 편리함을 주는 대신 건강을 앗아가는 모양이다. 노트북을 구매하고 4년 동안 나는 참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지만, 문명의 악마가 그 대가로 4년간 내 눈 건강을 서서히 앗아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있다 없으니까 불편해 죽겠다. 보지 못하는 것의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인지도 새삼 알겠다. 나의 일이 아닌 줄로 알았던 눈 건강이 내 일이 되고 나니, 세상의 모든 자잘한 건강들이 내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도 알겠다. 대장이나 위장처럼, 얼굴에 붙은 눈코입 또한 관리하고 유지하고 돌봐야 하는 일임을... 절절히 느낀다.


안경을 맞추고 집에 와서는 컴퓨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계속 컴퓨터를 쓰셔야 하면, 노트북보단 PC 모니터를 보시는 게 훨씬 눈에는 부담이 덜해요"라는 직원의 조언 때문이었다.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저렴하게 구매한 내 노트북 모니터는 지금 보니 색 구현력이 정말 눈이 시리게 자극적인 게 아닌가. 결국 남편을 꼬드겨 조립식 PC를 하나 주문했다.


오늘은 거의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글을 써왔던 나의 인스타그램에, 눈이 아파 글을 못 쓴다는 글을 올렸다. 도저히 눈을 파고드는 내 싸구려 노트북 모니터를 쳐다보고 일할 자신이 없었다. 조립식 PC가 도착할 때까지는 자체 휴식이다. 내 눈님이 완전히 보는 것을 포기하시면 안 되니까. 얼른 PC가 도착하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하루다.


눈님, 제가 잘못했으니 제발 돌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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