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주제로 한 글쓰기. 어디까지가 사생활 침해일까.
출판사 대표님과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한 문학계 이슈를 듣게 된 적이 있었다. 굴지의 출판사에서 출간된 한 소설이 때아닌 공방에 시달리고 있다는 거였다. 들어보니 작가가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의 성 정체성 문제를 소재로 소설을 쓴 것이 발단이었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성 정체성이 세상에 드러난 사람, 즉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작가의 지인이라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오랜 실랑이 끝에 얼마 전 해당 출판사에서는 결국 판매중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이제 판매중지가 됐으니 더더욱 읽어볼 수 없는 노릇. 사실 판매중지 기사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는 작가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나도 글을 쓰고 있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해 이야기를 써내는 것이 작가인지라, 그런 작가에게 주변 인물은 어쩔 수 없이 글에 영향을 주고 스며드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 작가에게도 주변인의 이야기를 쓰려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직업윤리가 나름대로 있기는 했다. 너무나도 기본적인 것이지만 실명을 거론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직접적인 신상정보(주소, 전화번호, 직장명 등)를 가려주는 것이 그렇다. 나 또한 지인의 이야기를 쓸 때가 있고, 그럴 때면 본명이 아닌 이니셜이나 아예 가명을 지어 사용하는 식으로 주변인을 묘사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번 판매중지 사건의 경우는, 일상적인 사실의 전달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었다. 바로 성 정체성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끼어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어떤 사회인가.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적인 시선이 아직 만연한 세상이 아니던가. 물론 예전에 비해서는 미디어 등을 통한 꾸준한 계몽으로 성(性)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조금 옅어지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성소수자를 바라볼 때였다. 그 성소수자가 티브이 속의 아무개가 아니라 내 지인일 경우, 내 딸 내 아들일 경우에도 시선이 관대한 사회인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지 못하겠다. 왜냐면 성소수자는 우리 곳곳에 분명히 존재한다는데, 희한하게도 내 주변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커밍아웃할 수 없는 사회라는 증거일 테다.
이렇게나 아직 보수적인 이 나라에서 커밍아웃하지 않고 지내는 성소수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들이 커밍아웃하지 않는 건 스스로의 성 정체성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아직 세상이 그들을 너른 품으로 받아줄 준비가 안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 판매중지 사건의 경우는, 단순히 작가가 주변인의 이야기를 너무 특정 지어 쓴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성 정체성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세상에 아우팅 되었다는 게 핵심이었다. 처음엔 나도 ‘피해자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가, 몇 번이고 감정이입을 해보고서야 생각이 바뀌었다. 만약 내가 레즈비언이라면.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지금껏 숨겨왔던 이 중대한 사실을, 어떤 이가 갑자기 자신의 글을 통해 알린다면. 그때 내 심정은 어떨 것인가. 단지 내가 몇 키로고 주근깨는 몇 개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지면이 통째로 흔들릴만한 비밀이 까발려졌을 때,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
단지 그 작가에 대해 이런 아쉬움은 든다. 조금 더 섬세함을 갖췄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 왜 설정을 조금 더 과감하게 비틀지 않았을까, 왜 피해자가 특정될 정도로 안일하게 글을 쓴 걸까, 안타까웠다. 작가도 행복하고 피해자도 보호받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작가의 이야기할 자유는 분명 중요한 권리지만, 이번 경우엔 피해자의 이야기되지 않을 자유가 조금 더 컸던 사건이 아닌가 싶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하고 나자 문득 얼마 전에 계약한 내 원고가 갑자기 두려워진 나. 내 입장에서 내 입맛에 맞게 오려지고 다듬어진 이야기들에는, 과연 신상이 드러나 피해를 볼만한 사람이 없는가. 나 또한 나의 글 쓸 권리를 위해 피해자가 원치 않는 아웃팅을 당할만한 이야기를 쓰진 않았는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를 부랴부랴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았다. 어우야, 백화점에서 만나고 지지고 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저 본명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느껴졌다. 과감히 전혀 다른 이니셜, 전혀 다른 나이로 모든 신상정보를 바꾸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됐다. 물론 아무리 신상을 다르게 써놨다고 한들, 읽는 사람은 본인의 이야기란 걸 바로 눈치채고 말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 사람의 지인들이 읽었을 때 “이거 네 얘기네” 하고 100% 유추하는 일은 막아줘야 할 터. 그게 그나마, 작가의 ‘이야기할 자유’와 타인의 ‘이야기되지 않을 자유’가 적정한 선에서 합의된 지점이 아닌가 싶다.
“아예 남 얘길 안 쓰면 안 돼?”
글을 써보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주변인들의 이야기는 내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녀와 내가 만난 이야기, 그녀와 내가 다툰 이야기, 그녀와 내가 공통으로 경험한 사실 등은, 사실 내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남 이야길 하나도 쓰지 않겠다는 각오는, 포크 자국을 내지 않고 케익을 먹겠다는 소리처럼 애초에 불가능한 것 같다.
어떤 책을 읽어보아도 작가만 덩그러니 놓인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서 주변인이 거세된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가는 타인의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되, 그 안에서 나름의 윤리를 발휘해 타인을 보호해주는 수밖에는 없을 터다. 그리하여 나 또한 이번 기회로 이런 글쓰기 철칙을 스스로에게 정해 보는 바다.
1. 나와 연결된 이야기가 아니면 타인의 이야기를 쓰지 말 것.
예를 들면 A라는 친구가 나와 다툰 이야기는 내 글에 쓸 수 있지만, A라는 친구가 B라는 친구와 다툰, 나와 연결지점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쓸 필요가 없다.
2. 타인을 묘사할 때는 신상정보를 완벽하게 뒤틀 것.
이름, 나이, 직장명. 이 정도만 바꾸어줘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내 이야기 속 특정인이 완전히 노출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머리색, 키 같은 추가 정보까지 더 꼼꼼하게 바꿔준다면 물론 더 좋다.
3. 심한 욕은 하지 말 것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하고는 맞지 않아서 싸웠던 인물이 다른 사람에게는 천사일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간성 자체를 멋대로 호도하는 식의 욕은 쓰지 않는다. “걔는 악마다, 인간성이 틀려먹었다”보다는 “걔는 너무 개방적이어서 나랑은 안 맞는다”라는 표현이 더 낫다. 생김새 따위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나름의 철칙을 세운 나도, 이야기할 자유를 빙자로 숱한 과오를 저질렀었다. 한 때 내 친구를 편든답시고 특정 직업군을 비하했다가 그 직업군에 종사하던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이 있으며, 특정인을 충분히 유추 가능하게 묘사하는 바람에 뭇매를 맞고 게시물을 삭제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보다 항상 나의 글 쓸 권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려면 내 주위에 일어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내 글의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 또한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내 ‘이야기할 자유’가 지켜지면서도 그 사람의 ‘이야기되지 않을 권리’가 지켜질 수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글 쓰는 이들이 이 딜레마를 현명하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글에 대한 공부가 비단 문장력을 키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 좋은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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