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이동진과 아이유가 말하는 건강한 성공의 비결
아까운 시간이 흐릿한 눈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게 화가 났다.
라섹수술을 한 지 이제 2주가 지나간다. 나는 화가 나 있었다. 2주나 지났는데도 눈이 아직도 잘 안보였기 때문이다. 나 엄청 바쁜 사람인데... 나 글도 써야 되고, 원고도 수정해야 되고, 봐야 될 드라마랑 영화랑 책도 넘쳐흐르고 있는데..., 아까운 시간이 흐릿한 눈으로 지나가고 있다는 게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계획한 일들을 다 해내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지나가자, 어느 날은 억울한 마음에 남편을 붙잡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잠자코 들어보던 남편이 말한다.
“자기야, 자긴 너무 조급해. 내가 말했잖아, 라섹은 몇 달에 걸쳐 서서히 좋아지는 거라고. 지금은 그냥 좀 쉬어. 책도 좀 나중에 보고, 글도 좀 나중에 써”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참 속 편하다 너는. 나는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지금 너무나도 많단 말이야, 너와는 다르게.
그러나 충분한 눈의 휴식을 취하라던 의사 선생님의 말과 남편의 말을 무시하고, 밤늦게 명멸하는 모니터와 눈을 부릅뜨고 싸운 결과. 좋아지려던 시력이 다시 한 단계 후퇴하고 말았다.
“자기야 눈이 이상하네, 이상하게 저번 주보다 더 안 보이는 거 같아...,”
“어젯밤에 불 끄고 모니터 봤지? 그러면 안된다니까....”
“아니 원고를 고쳐야 되는데 그럼 어떡하냐고...”
양보 없는 대화가 오고 간 뒤에야, 남편은 충격요법을 시도한다.
“150만 원 들여서 수술해놓고, 몇 주를 못 참아서 다시 150만 원 날릴래?”
그 말을 듣고 나니 아차 싶다. 역시, 냉정한 수치를 갖다 대야 머리는 그제야 인식을 하는 모양이다. 더 글을 오래 잘 쓰기 위해 눈을 수술해놓고, 그 몇 주의 회복기간을 못 참아서 수술비를 날릴지 모르는 상황을, 나는 고집하고 있었던 거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모니터 보는 시간을 대폭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건강에는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 모두가 포함된다.
언제부터 이런 성격이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멍을 때리거나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엄청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있는 걸 잘 못해서,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본다던지, 쓰려고 마음먹었던 글을 끄적인다. 나의 월간 계획표에는 거의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행해야 할 무언가가 빼곡하게 써져있다. 그러나 이 모습이 남편의 눈에는 자주 ‘조급하게’ 보이나 보다. 주어진 시간을 그냥 편하게 보내지 못하고 뭐라도 하겠다고 동동거리는 게, 어쨌든 여유와는 거리가 먼 것일 테니까.
물론 생산적인 사람은 정말 멋있다. 하루 계획표를 완벽히 지키고, 미래를 위해 올곧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은 늘 닮고 싶은 유형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나의 건강을 지키면서 할 때에 빛을 발하는 것일 테다. 그 건강에는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 모두가 포함된다. 빡빡한 계획표를 세워 무리하게 이행하는 것이 몸이나 마음 어느 한쪽을 상하게 만든다면,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눈에도 행복한 사람이 아닌 그저 조급한 사람으로만 비칠 뿐이라면. 그걸 과연 건강한 생산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라섹수술로 눈이 침침한 덕(?)에, 무리한 일정표를 모두 폐기하고 남편 말대로 조금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보았다. 당연하겠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일정표를 안 지켰냐며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시간을 흥청망청 썼으니 네 미래를 앗아가겠다는 사람은 더더욱이 없었다. 눈과 함께 마음의 여유도 생겼음은 물론이고.
해낼 수 있는 만큼만을 정성을 들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늘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놀랍도록 많은 일들을 해치우면서도 늘 시간이 없고, 절반밖에 하지 못했다고 툴툴댄다. 오로지 생산성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내 남편처럼 느긋한 사람이 한 번씩 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너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 너무 조급해 보여. 건강을 지키면서 해야지” 별 것 아닌 이런 말들은, 때때로 내가 모르던 내 모습을 선명하게 비추어준다. 건강한 생산을 해내는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갈아서 무리하게 뭔가를 만들어내려던 자신을 말이다.
나는 성공한 모든 사람들은, 대단한 계획표를 만들어 아무런 착오 없이 수행해온 사람들일 거라고 짐짓 생각했었다. 그러나 얼마 전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좌우명을 알게 되고는 사뭇 놀랐다. 그 박학다식하고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두터운 영화평론가의 좌우명이 글쎄,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지 않겠는가! 여기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내 생각과는 결이 전혀 다른 그의 성공이었다. 그의 성공은, 강박에 의해 몸을 혹사시키며 건설된 성공이 아니라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았더니 따라온 성공이었던 거다. 그래, 미래라는 족쇄에 갇히지 않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는 게 중요한 거구나.
널리 알려진 ‘아이유’의 생활신조 역시 비슷한 결을 띤다. 그녀의 세 번째 생활신조는, 다름 아닌 ‘일은 적을수록 좋다’이다. 발표되는 신곡마다 음원차트를 석권하고 콘서트를 전석 매진시키는 국민가수의 신조라기엔 역시나 놀라운 면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어째서 아이유가 반짝 가수가 아닌 이렇게 롱런하는 가수로 살 수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욕심을 내서 일을 무리하게 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만큼만을 정성을 들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힘들어서, 나는 갑자기 늴리리 맘보처럼 누워서 눈을 위해 쉬지만은 못하고 있다. 여전히 하루에 조금씩은 글을 써야만 마음이 놓이고, 영화도 책도 간간이 읽어주어야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빡빡한 입시학원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하기로 한 숙제는 곧 죽어도 끝내야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은 내려놓기로 했다. 오늘 하루 내가 열심히 살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리면, 몇 가지쯤 못했다고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열심히’의 의미를 더 여유롭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백백신을 맞아 열이 나는 나머지 종일 몸을 일으키지 못한대도, 예상한 일의 절반밖에 끝내지 못한 채 하루가 저물었대도, 그리고 때로는 컨디션이 너무도 난조해 며칠쯤 아무것도 안 한 채 쉬어가야 한 대도, 내 인생이 엄청나게 흐트러지거나 미래가 무너지지는 않으니까. 아니, 어쩌면 일정표를 무리하게 지키는 것보다 내 몸과 마음의 여유를 우선적으로 지키면서 사는 것이, 그 ‘열심히’를 더 오래 지속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조건 5년 안에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1년 치 계획을 미리미리 세워두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바로 어제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도 영화평론가 이동진처럼 인생 전체를 되는대로, 아이유처럼 일을 적게 정성 들여 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강박에 쫓기지 않고 건강하게 만들어낸 하루하루로 시간을 쌓아보고 싶어졌다. 뭐 베스트셀러가 좀 늦게 될 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오늘 내 하루는 조급하지 않고 한결 평화로우니, 이 자세로라면 적어도 병든 베스트셀러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보다 산뜻하고 여유롭게, 롱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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