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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Jul 05. 2022

엄마의 밥상은 왜 나날이 화려해질까

툴툴거리기 바쁜 딸은 어떻게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나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엄마의 노동이 끊기지를 않는 걸 보고 있자면
왠지 부아가 치밀곤 했다.


“엄마 이번엔 정말 조금만 해. 너무 많아도 다 못 먹어”         

 

친정엄마에게 늘 당부하는 얘기다. 결혼을 한 후, 남편과 함께 친정집을 찾을 때면 엄마는 늘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렸다. 때론 육해공이 한 상에 있기도 하고, 때론 서로 다른 고기 요리가 세력다툼을 펼치기도 했다. 메인 요리도 기본 두세 개는 되지만, 나물부터 밑반찬까지 사이드도 빼곡한 밥상을 보노라면, 과거 왕들의 수라상이 그랬을까 싶을 정도다. 이렇게 엄마가 정성껏 차린 상에 그저 수저만 들고 앉아 먹으면 되는 우리 자식들은 얼마나 편하고 즐거운가. 하지만 문제는 딸내미인 내가 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작년 명절까지만 해도 나는 엄마와 늘 이 문제로 작은 다툼을 벌였다. 흐드러진 엄마의 상차림을 마주하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차리려고 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준비했을까, 돈이 너무 많이 든 건 아닐까, 우리가 다 못 먹으면 속상하겠지? 남으면 아까워서 어떡한담. 맛있게 먹으면서도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신경이 쓰이는 건 또 있었다. 엄마는 식사가 끝나면 바로 설거지를 하는 타입이라 한 시간 가까이 부엌에 또 붙어있곤 했다. 그렇게 설거지가 끝나면 과일을 내오고, 과일이 끝나면 머잖아 또 저녁을 차려야 할 시간이다. 엄마의 노동이 도통 끊기지를 않는 걸 보고 있자면 나는 왠지 부아가 치밀곤 했다.          


‘그러게 좀 조금만 하라니까.. 왜 맨날 흐드러지게 차려서 고생이냐구’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나는 그 등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15분이면 뱃속으로 사라질 상을 차리기 위해 고생했을, 그리고 그걸 또 죄다 치우느라 고생하는 엄마를. 그리고 우습게도, 그게 내가 착한 딸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다 지난 명절엔 아예 속에 있는 소릴 바깥으로 꺼내 “엄마 음식 좀 적당히 해. 너무 많이 하니까 다들 먹지를 못하잖아” 하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내뱉자마자 아차 싶었던 말. 꺼내지 말고 속에 묻어뒀어야 할 말. 순식간에 공기는 차가워졌고, 엄마는 답했다. “너는 말을 참 밉게 해”라고. 알 수 없는 미안함과 원망이 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친정을 찾을 때마다 반복되는 이 지겨운 레퍼토리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최근까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수도 없이 딸의 지적과 핀잔이 이어져도, 친정을 가겠다고 말하면 “그럼 고기 할까? 훈이는 뭐 먹고 싶대?”라고 물으며 눈이 반짝이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그동안 엄마를 걱정하고 배려한 게 아니라, 그저 내 뜻대로 엄마의 마음을 판단하고 있었던 거였다.          


말하자면, 그동안 나는 엄마의 모습에 나를 투영시켜 이해한 것에 불과했다. 주부인 내가 음식 준비하는 것이 귀찮고, 설거지하는 것이 피곤해서, 엄마도 으레 그럴 거라고만 여기면서. 편안하게 쉬면 얼마나 좋을까, 나가서 사 먹거나 시켜먹으면 설거지도 안 하고 얼마나 편한데. 늘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마를 진짜로 이해하려면 엄마가 되어보아야 했다. 엄마의 행복을, 엄마의 낙을, 그것들이 어떻게 음식과 연결되어 있는 건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했던 거다.           


평생을 자식을 바라보고 산 엄마에게 가장 큰 행복이자 낙은, 자식과 함께하는 순간이 아닐까. 엄마에겐, 15분의 식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건, 얼마나 많은 접시를 닦고 치워야 하건, 그로 인한 노동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딸과 사위를 위해 요리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서 전후의 피곤하고 귀찮은 과정들조차 매번 까먹는 것인지도 몰랐다. 애들이 알아주지 못해도, 다 못 먹고 남겨도, 늘 처음 요리를 하는 사람처럼 즐거운 사람. 당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요리를 자식들이 먹는 것이 세상 가장 큰 행복인 사람. 그게 엄마니까.                 

    

이 감정은 친정엄마뿐만이 아니라 시댁에 가도 한결같이 느끼는 대목이다. 멀리 떨어진 시댁을 어쩌다 한 번씩 찾을 때면, 시어머니는 언제 다 장을 보고 준비를 해놓으신 건지 고기며 국이며 반찬이며 늘 밥상이 산해진미로 넘실거린다. 부엌에 서계신 어머니의 그런 뒷모습은 참으로 익숙한 모양이다. 우리 애들이 좋아할라나? 맛있어 할라나? 하는 즐거움과 설렘이 잔뜩 묻은 그 등. 친정에서 보았던 우리 엄마의 등과 꼭 닮았다.           

나는 그 등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다. 결혼한 지 무려 4년 차가 되어서야. 덕분에 요즘의 나는 친정엄마를 더 이상 타박하지 않는다. 엄마가 하고 싶은 음식은 땅끝에서라도 공수해서 해 먹이도록 놔둔다. 엄마에겐 그게 노동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걸 이제 별표 세 개 제대로 치고 이해했으니까. 나의 임무는 그저 맛있게 먹는 것이며, 엄마는 나의 그 모습이면 모든 피곤함이 날아갈 것이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단 한 번도 맛없던 적이 없었다


시댁에 가서도 요즘 꼭 하는 일이 있다. 바로 폭풍 칭찬해드리기. 신경 안 쓰는 척하시지만, 우리 시어머니도 애들이 잘 먹고 있는지 맛있어하고 있는지 민감하게 살피고 궁금해하는, 어쩔 수 없는 또 한 명의 엄마시니까. 당신 손으로 차리신 음식에 자식들의 소소한 칭찬이 이어질 때, 태연한 척하셔도 어머님의 입꼬리에 서서히 만족감이 물드는 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잊지 않고 항상 말씀드린다. “어머니 맛있어요. 국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고 다 맛있어요” 하고.          


돌이켜보니 어쩌면 나 역시도 엄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내 요리에 대한 남편의 피드백을 적잖이 신경 쓰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매번 지겹게 반복되는 저녁상인데도 남편이 특히 맛있다고 얘기해주면 그날은 설거지하는 마음이 즐겁고, 뭔가 부족함이 느껴지는 날이면 남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까지도 알아챌 만큼 민감하다. 시켜먹고 나가서 사 먹는 게 좋은 날이 다반사이면서도, 남편의 친구들이 놀러 오면 꼭 내 손으로 만든 걸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도 엄마들처럼 되어가는 건지, 아니면 모든 주부에게는 식솔들을 맛있게 먹이고 싶은 마음이 내재되어있는 건지는 여전히 헷갈리지만.  

        

내일모레면 또 친정집에 가는 날이다. 엄마는 벌써부터 이지 가지 장을 보며 맛있는 걸 해주기 위해 행복에 젖어있을 터다. 이번에는 더 맛있게 먹어주어야지. 왜 이렇게 많이 차렸냐고 성질내지 말아야지. 물론 엄마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딸이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단 한 번도 맛없던 적이 없었다는 걸, 괜한 심술을 부려왔지만 내 인생에 엄마가 해준 밥보다 맛있는 밥은 없다는 걸.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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