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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Dec 08. 2022

그 다정함이 나를
충성하게 만들었다

내가 꼭 반드시 우리 요가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어진 이유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다정함은 생각보다 곳곳에 있어


특별한 다정함을 느낄 일 없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곳곳에 다정함이 포진해있다는 걸 자각하게 될 때가 있다.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글을 쓰는 게 전부인 나의 일상에도, 돌이켜보면 다정함은 스며들어 있었으니. 

         

지난해 겨울부터 지금까지 반년 가까이 나는 꾸준히 요가를 해오고 있는 중이다. 뭉친 근육을 이완하고 호흡을 가다듬어 마음의 평화를 도모하는 이 시간을, 하루 중 유일한 힐링으로 여기며 무척이나 열심히 해왔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단순히 요가라는 운동의 속성에 반한 것도 있었지만, 가르쳐주시는 선생님 덕분이라는 자각을 최근에서야 하게 됐다.          


삼십 대 중반의 우리 요가 선생님은 언제나 흐트러지지 않는 다정함의 소유자다. 오후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한 시간씩 세 타임을 연달아 수업을 진행하시는데도, 그녀는 단 한 번도 회원들에게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거의 매번 마지막 타임인 아홉 시 수업을 듣곤 했는데, 이미 앞서 두 시간을 수업하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생님은 늘 일관되게 친절했다. 

          

“눈을 감아보세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몸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세요~ 어디 이상한 곳이 있으면 무리하면 안 돼요~”   

       

나긋나긋한 목소리. 매 수업 때마다 진행하는 이 반복되는 말의 마디마디에도 선생님의 다정함은 묻어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수업은 수요일 아쉬탕가 수업 시간. 그때는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선생님이 매번 회원들의 호흡 상태를 일일이 봐주신다. 회원들의 흉부에 손을 직접 가져다 대면서. 깊은 들숨과 날숨 사이 선생님의 따뜻한 손이 맞닿음을 느낄 때, 누군가의 손길을 받는다는 것의 애틋함을 느끼곤 한다. 입으로만 설명하며 수업하실 수도 있는데, 구태여 그녀의 손길은 회원 한 명 한 명의 흉부에 가 닿는 것이다. 이런 남다른 프로의식은 다름 아닌 회원들에 대한 애정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신 사이...



그러던 어느 날, 그렇다 할 소식도 없이 갑자기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신 적이 있었다. 수업에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나를 비롯한 모든 회원들이 깜짝 놀랐다. 설마 선생님이 관두신 걸까? 순식간에 아쉬움과 두려움이 마음을 강타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생님이 뒤늦은 코로나에 걸려 자가격리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됐다. 회원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이 친절한 선생님을 절대 잃을 수 없다는 마음. 아쉽지만 선생님이 부재한 그 일주일은 다른 대타 강사의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거기서 선생님의 다정함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줄이야.           


태어나 요가 수업을 들어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던 나는, 세상의 모든 요가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처럼 꼼꼼하고 친절한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대타로 온 선생님은 나의 그 순진한 편견을 와자작 깨버리고 말았는데.          

나는 요가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매번 열심히는 따라 하려고 노력하는 진득한 노력형 수강생이다. 그래서 어떤 동작이 잘 안 되더라도 따라 하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낑낑대는 타입이었다. 그날도 대타 강사가 하는 동작을 따라 하려고 온 열과 성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더니 강사가 말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하고 숙여야지 그렇게 동그랗게 말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안 하느니만 못한 거예요”          


여러 회원들 앞에서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게 나를 향해있는 말이란 걸 알았다. 어려운 동작이었기에 나이 드신 분들은 아예 쉬고 있거나, 나머지는 제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노력은 하고 있으나 뭔가 엉성하게 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던 것이다. “안 하느니만 못해요” 하는 그 말이 메아리처럼 내 귀에서 울렸다. 그 말은 열심히 해보려는 회원을 북돋는 말이 아니라, 회원의 사기를 꺾는 말이었다.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다정함이 필수 자질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자신은 오랜 수련을 거쳐 어려운 자세에도 능숙한 입장이 되었으니, 동작을 따라 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초보자가 답답하고 웃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숙련자이기 이전에 선생님이 아니던가. 모름지기 선생님이란 우등생만을 모아 가르치는 위치가 아닌, 못하는 사람을 응원하고 가르쳐서 능숙하게 만드는 위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자세를 잡아주기는커녕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주다니, 나는 그날 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뚝 하고 떨어져 버렸다. 요가를 하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선생님이라면 내 허리를 잡으며 알려주었을 텐데. 천사 같은 목소리로 “허리를 이렇~게 꼿꼿하게 해 보세요. 거 봐요 훨씬 잘되죠?”하고 말이다.          



물론 가르치는 자에게 학생들에 대한 다정함이 필수 자질은 아닐지 모른다.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이론을 무뚝뚝하게 멀리서 전달하기만 해도, 흡수할 사람은 알아서 흡수할 테니까. 못하는 사람을 나무라는 게 어떤 의미로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중에 어떤 선생님이 더 좋은 선생님이냐 묻는다면 나는 두말할 것 없이 학생 개개인의 성장에 애정을 갖고 용기를 북돋는 우리 선생님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우리 선생님 덕에, 한 번 시도해보고 관둘 수도 있었을 요가를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고, 몸도 눈에 띄게 건강해졌으니까 말이다.          





사진출처:핀터레스트


친절한 나의 선생님은 코로나 격리가 끝난 뒤 다시 웃는 얼굴로 건강히 돌아오셨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한 명 한 명 회원들의 이름을 불렀다. “듬지님 오셨네요, 잘 지냈어요?” 선생님이 여러 명의 회원들 중 하나인 내 이름을 알고 기억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따뜻한 일인지.          


어려운 동작이 많은 아쉬탕가 수업에서는 많은 회원들이 저마다 안 되는 동작을 해보려고 낑낑대지만 선생님과 함께하는 이상 우리는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는다. 선생님은 돌아다니면서 한 명 한 명의 자세를 잡아주고, “와 많이 늘었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그날도 선생님은 땀이 흥건한 내 등과 골반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잡고선 미세하게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아주셨다.      

     

‘아, 이래서 내가 이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거지’  

        

다정함이란 이토록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사이에서도 모종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마법의 요소인 듯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끈이 있는 것처럼, 나는 다정한 선생님에게 이끌려 조금씩 조금씩 요가의 매력에 빠져가고 있다.  










인스타그램 @woodumi

블로그 blog.naver.com/deum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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