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부부 사이... 함께든 따로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닐지도?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서른세 살의 크리스마스 이브. 나이를 이쯤 먹으니 별 화려하고 요란한 크리스마스를 다 겪어보아서 그럴까. 올해는 그저 편안하고 따뜻하고 싶다는 욕심뿐이었다. 이번 겨울이 좀 추웠는가. 정말이지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원은 쉽게 이루어졌다.
이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남편은 이미 스키장으로 떠나고 없는 상태였다. 누가 보면 애정 없는 쇼윈도 부부라도 돼서 서로 따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크리스마스 풍경이었다. 서로에게 윈윈인 딜(deal)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아내(나)의 제안 :
크리스마스에는 막상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움직이기 싫어. 크리스마스 되기 전에 크리스마스 느낌 나게 데이트 해주면 스키장 보내줄게. (편하고는 싶은데 기분은 내야겠음)
남편의 생각 :
오, 개꿀! (스키장은 가고 싶고, 아내를 열 받게 하기는 싫음)
그날이 크리스마스던 모세의 기적이 행해진 날이던, 그저 휴일이라면 스노보드를 타고 싶을 남편에게 나쁜 거래일 리가 없었다. 당연히 남편은 동의했고,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미리 파스타를 먹고 분위기가 예쁜 카페 한 곳을 다녀옴으로써 크리스마스 의식을 간단히 마무리지었다. 정말, 그거면 충분했다. 그게 무슨 기념일이든 간에 의식은 짧고 굵게. 휴식은 길-게 취하고 싶은 체질이 되어가는 중이기에.
이게 완벽한 크리스마스가 아님 뭔데!
그렇게 남편이 스키장으로 떠나간 이브. 혼자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리다 저녁 여덟 시 즈음 패딩을 뒤집어쓰고 편의점에 기어나가 11,900원짜리 와인 한 병과 롤케이크를 사 왔다. 그리고 불을 끄고 넷플릭스를 켜, 신중하게 영화를 골랐다. 크리스마스 느낌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영화였지만 영화는 재밌었고, 와인도 가성비가 좋았으며, 늘 먹는 롤케이크는 달콤하게 입안에서 뭉개졌다. 알딸딸하고 따뜻한 이 순간. 이게 완벽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면 뭘까!
오랜 시간 우리 부부를 지켜봐 온 지인들은, 나와 남편의 이 ‘따로따로’ 행보에 이제 적응하는 눈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가끔 놀라곤 한다. 일종의 문화충격일까. 물론 겉으로 보기엔, 남편이 나를 버려두고 스키장에 간 듯 보이고, 홀로 남겨진 부인은 쓸쓸하게 싸구려 와인이나 마시고 있는 처지 같지만, 사실은 어떤가. 내가 남편을 먼저 버렸고, 나는 포근한 집에서 무척이나 행복했다는 게 팩트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부부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들을 같이 하는 부부. 많은 것들을 따로 하는 부부. 나는 무엇을 같이하든 같이하지 않든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같이하든 따로 하든 그게 불편하냐 불편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함께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사이가 있다. 같이 일어나고, 같이 취미활동을 하고, 같이 친구를 만나고, 같이 잠드는 부부들. 서로가 함께하는 순간이 만족스럽고 그로 인해 사이가 원만하게 유지된다면 그건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다.
그러나 그 반대도 같다. 무엇이든 따로 하는데, 그게 불편하지가 않은 부부. 그게 바로 우리 부부다. 우리는 따로 일어나고, 따로 잠들고, 따로 밥을 먹고, 따로 취미생활을 즐기지만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둘 다 개인적이고 간섭을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만약 둘 중 한 명이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했다면 우리 부부가 지금처럼 평온하게 잘 살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혼사유로 “이 사람이 자꾸 저랑 뭘 같이 하려고 해요”라고 적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런 것도 '천생연분'이지 않을까?
지금처럼 관계의 다양성이 존중되기 전, 세상이 말하는 ‘천생연분’이란 모든 걸 함께하고 빈틈없이 공유하는 사이를 칭했던 때가 있었다. 나도 한때는 다른 잉꼬커플들을 따라 우리 커플도 저렇게 촘촘하게 붙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경험을 해보면서, 서로의 영역이 중요한 우리 커플에겐 모두 적용되지 않는 공식들임을 찬찬히 깨달아갈 뿐이었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싸우는 이유들은, 혼자 하고 싶은 것들을 존중받지 못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강요할 때가 대부분이었으니.
“아니 그럼 따로 살지 결혼을 뭐하러 해?”
어디선가 들려올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대답을 하자면 나의 대답은 이때도 역시, “이렇게 따로 하는 걸 존중해주는 이 사람을 사랑하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내버려 두는, 모난 내게 퍼즐처럼 꼭 맞는 이런 사람을 내가 살면서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는 크리스마스에 혼자 스키장을 가는 남편일지라도, 나에게는 천생연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반나절이 지난 오후. 남편은 느지막이 스키장에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다. 케이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를 알고, 돌아오는 길에 케이크를 사 온 거였다. 서로에게 길들여진, 엄연한 부부임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자동반사적으로 ‘케이크+크리스마스=아내를 만족시킬 가성비템’을 연상했을 그에게, 정말이지 무한 애정이 샘솟는다. 너, 내 남편이 맞구나?!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 헤어져 크리스마스 오후에 재회하고는, <재벌집 막내아들>을 함께 보며 케이크를 먹었다. 거의 모든 걸 따로 하는 부부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같이 하는 것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슬쩍 멋진 말을 인용해 보자면, 우리 부부는 ‘따로 또 같이’를 행하는 부부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내게 묻는다면, 그래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같이해도 따로 해도 싸우지 않는 거. 그게 찐 궁합이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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