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너는 내 선을 넘고, 나도 네 선을 넘지. 당신의 발작버튼은?
이 선 넘으면 침법이야, beep
‘아이유’의 노래 「삐삐」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다.
Yellow C A R D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beep
(중략)
Hello stuP I D 그 선 넘으면 정색이야 beep
마음속에 누군가를 허용할 수 있는 범위와 허용하지 못하는 범위를 구분 짓는 선이 하나 있는데, 네가 그 선을 넘으면 옐로카드를 내밀겠다는 뜻이다. 일종의 경계심이자 자기 방어를 귀엽게 표현한 말이다.
노랫말을 더 살펴보면 아이유는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선 넘는 추측이나 비난을 하는 게 불쾌했던 것 같다. 연예인의 삶이 으레 그러하듯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확산되고 재생산되어 원래와는 전혀 다른 루머로 양산되기도 하니까. 아이유는 그런 무례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 선을 넘으면 침범이며, 그런 행동은 교양이 없으니 깜빡이를 좀 켜고 들어오라고.
누구에게나 있는, 보이지 않는 선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나에게도, 친구에게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도. 요즘은 이를 다른 말로 ‘발작 버튼’이라고도 하는 듯하다. 다른 부분에서는 괜찮다가도, 유난히 민감해 건드려지면 이른바 발작을 하게 되는 부분을 일컫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발작 버튼이 가정사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감추고 싶은 신체적 비밀일 수도, 지난 과오나 흑역사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나만이 엄격하게 설정한 규범이나 예의일 수도 있으며, 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특수한 포인트일 수도 있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저마다 다른 발작 버튼이 존재할 수밖에.
나의 경우엔 주로 꿈이나 일과 관련해 발작 버튼이 눌렸다. 누군가 나의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할 때, 나의 노력을 비웃을 때, 내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할 때. 또는 지나치게 계산적인 사람들을 마주할 때도 발작 버튼이 눌렸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찾는 친구나 받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들을 볼 때. 그럴 때 나는 내 선이 밟혔다고 여겼고, 그 선을 넘어온 사람들을 버리거나 떠나왔다. 누군가는 자신이 내 선을 밟은 것을 알기도 했고, 누군가는 영영 모르기도 했다.
하지만 관계는 공평한 거라서, 나 역시도 타인의 선을 밟을 때가 참 많았다. 워낙 예민하고 민감한 편이라 상대에 대한 눈치도 빠르다고 나름 자부하며 살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까. 살다 보면 나보다 더 예의나 규범에 민감해서 내 딴에는 사소한 잘못들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부분을 내가 실수로 건드리는 바람에 그대로 나와 멀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선 넘음에 대한 지론 3가지
이런저런 관계를 탁구처럼 주고받다 보니 이 ‘선’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지론이 생기게 되었다.
첫째는 이 ‘선 넘는 행동’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무례나 결례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겠지만, 나만의 선은 대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기준일 확률이 높다. 평소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나를 몇 번만 스캔해도 내가 어떤 부분에 민감해하는지 알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때문에 내가 비밀스럽게 설정해 놓은 선을, 상대가 별 악의 없이 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편해진다. 이를테면 내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컸기에 가정사를 건드리는 것에 민감한 경우라면, 나의 성장과정을 잘 모르는 이는 당연히 내 민감함을 파악하지 못할 수 있는데, 이를 쿨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위해 내 선을 꽁꽁 감춰두기보다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관계에 있어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꾸만 상대의 대화 주제나 행동이 내 비위를 거스르는 것 같다면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언질을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앗 저는 그런 주제 조금 불편해요”라던지 “음, 방금 그 행동은 조금 기분이 나빴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 같으면 굳이 저런 걸 왜 말할까 싶었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나와의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는 거라고 여겨진다. 그들의 그 말 한마디로 인해 나는 다음에 그 사람의 민감함을 캐치하고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셋째는 수용의 문제인데, 상대가 내 선을 넘은 경우라면 거기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후의 관계를 잘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단 한 번의 선 넘음으로 영원히 손절을 해버릴 수도 있고, 젊은 날의 나는 그런 식으로 떠나보낸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어떤 관계는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괜히 그랬나 싶고 아까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때는 무례했지만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면 우린 지금도 친구가 아니었을까 싶은. 그래서 누군가 내 선을 넘었을 때는 기분이 나빠도 그 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져 나와 차분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후에 관계가 호전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끝까지 말이 안 통할 사람인지를 말이다.
앞으로 잘 하는 게 중요한 거죠
가끔 휴대폰 속 연락처를 들여다보다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친구, 옛 동료, 지인들과 나는 왜 소원해졌던가. 그들이 내 비위를 거슬러 내가 도망쳐왔던 일이 어찌나 많았는지. 가끔은 그리움에 젖을 때도 있고, 내가 쓸데없이 예민하게 굴었던 건 아닌가 반성을 해보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한 번 거리를 두어 회복이 불가능해진 관계를 다시금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서로 어리고 서툴었기 때문에 실수만 반복했던 과거의 연애를, 지금에 와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게 아니듯이. 다만, 예전에 비해 관점이 더욱 성숙해진 만큼 앞으로는 조금 더 나은 인간관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는 바다.
고민 많고 마음 여린 어른이들을 위해 따수운 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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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결혼 힐링 에세이 『사연 없음』
현실 직장 생활 에세이 『어쩌다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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