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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 빚는 영양사 Nov 08. 2022

공원에서

낯선 할머니의 손이 내 바지 속으로 들어온 사연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남편과 공원 산책을 나선다. 집 근처 5분 거리에 있는 공원은 시시각각 계절감이 예뻐서 혼자서라도 꼭 들르는 곳.  


아침 8~9시 쯤, 졸린눈을 억지로 뜨고 눈꼽 세수를 한 뒤 남편을 강아지처럼 졸졸졸 따라 나선다. 집에서 입던 파자마차림으로 혹은 약간 도톰하게 옷을 겹쳐 입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산 뒤 공원 벤치에 가 앉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마시면서 가을 운치를 평화롭게 즐기다 보면 어느덧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가있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곱게 물든 단풍과 낙엽들을 바라보면서 남편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날이 갑자기 추워지면서 도톰한 옷을 껴입은 날, 아침 기온은 무려 0도. 우리가 공원을 나섰을 땐 10도 이하를 밑돌고 있어서 이제 곧 초겨울이겠구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낯선 손 하나가 꼬고 있던 다리 안으로 쑥 들어왔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바지밑단과 발목 사이로 쑥 들어 온 손. 내 다리를 만지려는 건가? 순간 심장이 뜨끔거리면서 으악!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몇 초가 흘렀고, 그 순간에도 낯선이의 손은 계속해서 움쩍거렸다.


너무도 당황해서 헉 소리도 못 내고, 살다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떤 XX인지 얼굴을 확인하면 소리를 꽥 질러줘야겠다 하고 손목 위로 시선을 올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 바지는 어디서 샀어요? 요즘 시장가도 이런 바지가 없데?"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을 때 끝까지 치밀어 오른 화가 땅밑으로 쑤욱 꺼지면서 궁금증 가득한 시선과 마주쳤다.


"예전엔 이런 바지 많이 입었는데. 이거 가볍고 도톰하니 좋지요?"


흰머리 성성한 온화한 표정의 할머니. 할머니는 옷감을 확인하듯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내 바지 밑단을 끼고 계속해서 문질러 댔다. 그제서야 할머니의 궁금증 가득한 눈초리를 이해하며 "너무 좋아요. 무겁지고 않고 따뜻해서. 저는 매일 이것만 입어요."라고 할머니에게 대답했다.


얼마전 온라인으로 구입한 나의 최애템, 김장바지.


요즘 나의 최애템, 김장바지. (광고 아님)


편안하게 집에서 입으려고 샀는데 너무도 따숩고 좋아서 어느샌가 문신처럼 내 다리에 장착되어 버렸다. 솜이불처럼 도톰하니 누빔처리도 돼있어서 이것만 입으면 담요를 두른 것처럼 엄청 따숩다. 특히 내가 가장 아끼는 분홍색 크록스와 세트로 장착해주면 편안함의 극치, 아침 산책룩으로 끝. 이만한 것이 없다.


쌀쌀한 날씨 속에 공원 경치를 즐기며 한 시간 동안 벤치에 나가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이 아이템 덕분. 게다가 하나에 육 천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나는 월동준비로 김장바지를 몇 벌 더 장만할 예정이다. 집 앞에 나가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무슨 소용이랴? 나만 편하면 됐지.


"시장가서 이런 거 암만 찾아도 없데. 어디서 샀어요?"


순간 아침 운동을 나온 공원 모든 할머니들의 시선이 내 김장 바지에 꽂혀 있단 걸 눈치 챘다. 김장바지는 할머니들의 인싸템이었다.


"온라인에서 샀어요. 인터넷으로 찾아 보셔야 되요."


부러움과 그리움의 눈빛. 할머니는 육 천 원이라는 가격을 듣자마자 예전에 느꼈던 김장바지의 따사로움에  대해 더욱 그리워했다. 나도 거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요즘 이게 유행인 것 같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가볍고 따뜻해서 다시 유행하나보다 등 다정스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후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구체적인 기억은 안 나지만 나의 마지막 말은 이거였다.

 

"할머니,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그 속 뜻은 '추운 날씨에도 감기 안 걸리게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항상 건강하세요' 라는 인사였다. 나는 할머니들이 좋다. 낯선 사람에게도 마치 아는 사람마냥 말을 걸어오는 할머니들의 순수함이 좋다. 공원 정자에 앉아 오손도손 모여 소녀처럼 깔깔대는 할머니들이 좋다.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나서.


내가 촌스런 김장바지를 사게 된 건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것 같다. 어릴 적 외갓집에 놀러가면 할머니는 항상 저런 바지를 입고 계셨는데 그때는 무척이나 촌스러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김장바지를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그립다. 보고 싶다. 김장바지를 보면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그리고 김장바지를 입고 있으면 외할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 난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래서 김장바지가 좋다.


난 할머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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