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그 말에 더 기운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들른 한 프랜차이즈 고깃집에서 우리 부부는 런치메뉴를 시켰다. 정말 대패로 썬듯 얇은 소고기가 소복히 올라가 있는 불고기 전골. 그런데 가스불 위에 놓고 고기가 익기 시작하면서 얇은 고기는 녹아 없어질 듯 흐물해지고 많아보였던 고기양은 그저 진짜 많아보였던 것이었다.
그걸 지금 나한테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남편은 자상하게도 내 개인접시 위에 버섯과 불고기를 손수 놓아주었다. 정성이 갸륵해서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려는 순간 소고기 특유의 냄새가 올라왔다. 양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특유의 냄새를 꺼려하는 것처럼 버터, 우유에서 느꼈던 비릿한 향기가 기름진 냄새와 함께 올라왔다. 남편이 쳐다보고 있어서 입에 넣고 씹기는 했지만 고기는 녹아 없어지고 풍성하게 국물 위로 떠오른 버섯들이 더 반가워보였다.
녹아 없어진 소고기처럼
내 마음도 흐물흐물 우울이라는 수면 아래로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2년째 이어진 한 출판사의 출간제의. 책을 읽지 않는 남편도 알법한 실용서적으로써는 꽤 유명한 출판사였다. 지난해에도 여름쯤에 출간제의가 들어왔다가 갑자기 달라진 계약조건에 출간은 무산되었고, 올해는 조금 더 이른 6월 말 경에 연락이 왔다.
비록 담당자가 달라지긴 했어도 적극적인 태도에 '똑같은 곳에서 2번씩이나 연락이 왔으니 올해는 진짜로 되려나?' 부푼 마음을 안고 미팅까지 했던 게 사실이었다. 집근처 커피숍에서 만났고 담당자와의 첫인사는 꽤 괜찮았다.
담당자의 말로는 내가 영양사계의 백종원이 될 것 같다나? (당연히 어느정도의 립서비스가 들어간 말이긴 하지만) 그러면서 지난해 연락주었던 담당자와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팀내 회의, 기획안 작성 등등 할일이 많다고 했다. 그렇게 연락을 받은 게 첫미팅을 하고나서 다음주 쯤이었다. 시간이 걸려도 기다려달라는 말에 바쁘겠거니 생각하고 거의 3주 동안을 말없이 지냈다.
계약이 성사된 건 아니지만 지난해 경험으로는 나의 새로운 레시피들과 콘텐츠들을 책 속에 넣어야 하니 SNS나 온라인 상에서의 활동들은 아끼고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레시피도 올리지 않고 여름휴가 겸 남편과 잠시 여행을 다니며 글쓰는 일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날 수록 메일이나 문자, 전화 한통이 없어서 3주만에야 먼저 전화를 했는데 답변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그리고 '나중에 연락드려도 될까요?'란 문자와 함께 3일이 지나도록 전화 한통이 없었다. 녹아 없어진 소고기처럼 모든 것이 흐물흐물, 나의 기대도 그렇게 녹아 없어져 버렸다.
남편은 고기를 먹자고 했다.
기운이 없어보였는지 남편은 휴가까지 내면서 고기를 사주겠다고 했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돈을 쓰는 외식의 권한은 대부분 경제권을 쥔 남편의 영향이 컸다. 나 또한 거기에 토를 달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눈치'라는 걸 보며 자발적인 가스라이팅에 동참했을지도 모른다.
돈을 주고 사먹는 외식의 권한은 오롯이 남편의 몫. 집에서 먹는 집밥은 내가 주문하고, 내가 요리를 하니 나의 노동력이 조금이라도 들어갔다는 마음에 눈치를 덜 보게 된 걸까? 남편의 카드로 계산하는 외식은 언제나 그의 선택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름 배려랍시고 자기가 좋아하는 고깃집으로 가서 채소도 떠먹을 수 있는 불고기전골을 시켰다. 그런데 그건 진짜 얇은 고기를 동동 띄운 버섯전골에 불과했다. 오히려 나에게 다행이었다고 해야할까? 반면에 남편의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
고기는 안 먹고 버섯만 건져먹는 나를 보며 남편은 앞접시에 고기와 버섯을 함께 놔주었다. "고기 먹고 기운내야지." 그런데 남편의 말에도 기운이 쭉 빠져있었다. 우리 둘 다 기대가 컸었던 모양이다.
나는 오히려 내 쪽에 남아 있었던 고기들을 남편 쪽으로 몰아 주었다. 정말 버섯은 다 건져 먹고 처음부터 동동 띄워져 있던 불고기 몇 점을 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소고기는 남편의 최애 음식이었다. 부인이 집에서 채식한다면서 몸에 이상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는 마음과 또 내가 안 먹을까봐 버섯으로 고이 감싸서 올려주는 자상한 마음. 나는 고기를 안 먹어도 힘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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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기회는 또 올거야.
나는 담담한 말투로 오히려 남편을 위로했다. 담당자의 개인사정이든 그 회사의 내부 결정이든 결국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2번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그것 모두 나의 글을 좋게 보고 가능성을 높게 사주신 분들의 응원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꾸준히 하다보면 기회는 언젠가 또 오게 돼있다.
책을 3권이나 출간하신 어떤 인생선배님의 말씀이 "너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책을 출간해도 오히려 안 좋을 수 있다. 일찍 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준비가 됐을 때 책을 내는 게 좋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솔직히 지난해 출간이 무산된 후 1년 동안 열심히 SNS를 운영해오면서 동영상 촬영이나 사진 촬영에 대한 실력을 레벨업 할 수 있었다.
인생에 족적으로 남을 수 있는 '책'을 출간하는데 나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만 대형 출판사에서도 아무나 책을 내게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돈으로 책값을 지불하는 냉험한 세계에서도 특히 나 같은 초짜 작가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텐데. 난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실패와 실패 속에 이어지는 시간을 노력으로 채우다보면 점점 더 성장하는 나를 만들 수 있다. 그 부분을 항상 함께 해주고 지켜봐주는 남편, 가족들, 든든한 구독자님들도 계셔서 더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여보,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아도 당신의 마음만으로 힘이 납니다. 남편이 떠준 버섯불고기전골은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