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를 연 순간 딱 저 광경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30도가 넘는 폭염에 아이스팩 하나 없는 배송박스 안. 심지어 껍질이 얇은 애플수박 하나는 반쪽이 나서 나뒹굴고 있었다. 뻘건 국물이 흥건하게 고여 이리뒹굴 저리뒹굴, 멀쩡해보이는 오이에까지 수박국물이 스며있었다. 조각난 애플수박은 약간은 뜨뜻해진 상태로 벌써 쉰내가 올라왔고 수박씨며 뭐며 엉망이된 배송박스를 물티슈로 깨끗이 닦아 놓으라 애를 먹었다.
애플수박이 싫으셨나?
우리 부부는 언제나 무거운 물건이 필요하면 직접 사러 나가는 편이다. 적은 배송료에 무거운 물건까지 부탁드리기가 죄송스럽다는 남편의 생각이었다. 허나 식재료 값 부담이 만만치 않아지면서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온라인 세일은 참아지지 않았다. 오프라인보다 싼 가격에 이 정도면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름 배송기사님을 배려한답시고 큰 수박은 엄두도 못 내고, 한번에 여러 짐을 시키는 것도 참아가면서 세일 오이 한봉지, 애플수박 2개를 시켰다. 그런데 그날 새벽, 기사님께서 수박폭탄을 투척하고 가셨다.
남편은 남의 편, 아니 배송기사님 편
"거참! 과일 같은 건 직접 사오지! 마트가 멀지도 않은데!" 수박이 깨졌는데도 남편은 남의 편만 들었다. 모든 건 과일을 직접 사오지 않은 나의 잘못이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화가 난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500미터면 닿을 거리를 이 더위에 직접 가기 싫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다들 이런 마음으로 온라인 배송을 시키지 않나?
예전엔 택배가 빨리 오지 않으면 배송기사님께 전화를 걸어볼까? 어쩔까? 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게 급한 물건이면 직접 사오면 되잖아." 급하고 중요한 물건일수록 내가 내발로 걸어나가 직접 확인하고 바로 사오면 된다는 말이었다. 처음엔 뭔소린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남편의 말이 맞다.
잊혀진 감사함
나는 언제부터 배송시스템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주문한 물건이 날개를 달고 자연스레 날아 오는 것도 아닌데. 이 더운날 배송기사님이 직접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스럽게 갖다주고 계신단 걸. 감사함을 잊고선 기사님의 노력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주문한 물건들은 내가 마트에 가서 산 다음 내가 직접 운반했어야 하는 물건들이었다. 일종의 서비스 금액을 작게나마지불하지만 감사하게도 배송기사님의 능력을 빌려 짐을 우리집까지 운반해오고 있었던거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배송기사님의 시간과 노력, 땀이 들어간다. 수박 폭탄은 배송기사님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게으름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돈을 지불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덜거나 감사한 마음을 잊게 된다면 그것만큼 비인간적인 태도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박폭탄은 나의 오만함과 비인간적인 태도를 터뜨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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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건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도 더운 날씨에 쉰내가 나게 된 애플수박은 과감히 버렸다. 깨끗이 씻지 않은 수박은 겉부분에 이물질과 세균들이 묻어 있을 수 있어 파손된 상태로 상온에서 오래 보관하게 되면 식중독의 위험성이 있다. 다행히도 온전히 남은 수박이 하나 있어 시원하게 갈아 수박주스를 만들었다.
애플수박 반 통에 레몬즙 1큰술, 오렌지즙을 넣으면 더 맛있다. 수박주스를 만들 땐 수박씨는 꼭 넣어야 하는데 이 수박씨가 영양가가 가장 높다.
환불을 위해 찍어 놓은 사진이 새로운 콘텐츠로 재탄생했다. 사진으로 남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이 일어난 다음 커피샵을 운영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요즘 장사가 너무 안 되서 배달일이나 새벽배송일로 투잡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기사님들이 정말로 남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비대면으로 도움을 받고 살아서 그런지 얼굴도 잘 모르고 말을 나눌 기회도 없었지만 더운날 시원한 수박주스로 잊혀진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