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며느리

16

무대에 깔려 피투성이가 된 체 실려나가던 모습.


‘난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넌 왜...날 모르는 거니?’


설사 서연두가 그 소녀라 하더라도 자신을 기억 못 할리 없었다.


틱틱-


그가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왠일이세요? 갑자기 이 시간에?”


“어. 김변. 부탁할 일이 있어서.”


“네? 무슨?”


“사람을 좀 알아봐줘. 13년 전, 2007년 4월 13일. 올림픽공원 근처 대형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던 16살 소녀. 작은 병원이어도 좋아.”


“환자 입퇴원 기록은 개인정보라 다른 사람에게는 공개가 안 돼요. 가족이 아닌 이상 힘들겁니다.”


“내가...그 사람 남편이야.”


“네?”


“서연두, 91년 5월 8일생. 그날 의료기록 싹다 뒤져서라도 알아봐줘. 중요한 일이니까.”


‘넌 왜...날 기억 못하는 거니?’


**


연두는 호텔 정문 앞에서 서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길 또 오게 될 줄이야.’


고 상무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W호텔이었다.


예전 기억이 다시 떠오르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공기 속에서 숨을 고른 연두는 결국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


여전히 화려한 로비.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샹들리에에서 흩날리는 금빛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직원들이 정중하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그 따뜻한 분위기는 오히려 연두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무심한 듯, 그러나 내심 떨리는 발걸음으로 안내데스크 앞으로 걸어갔다.


“저...예약했는데요?”


직원은 친절한 미소를 띠며 예약자 이름을 물었다.


“예약자 성함은요?”


“이명희요. 이, 명, 희.”


컴퓨터 화면을 확인하던 직원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눈빛이 흔들리며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명...이명희? 이명희! 헉!”


직원은 연두와 화면을 번갈아 보더니 급히 지배인을 불렀다.


잠시후, 아버지뻘 되는 지배인이 달려 나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아! 사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과한 환대에 연두는 얼떨떨했다.


“아, 예...예!”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꾸뻑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제일건설가의 공식적인 며느리.’


머릿속으로 그 말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요즘은 불화설 때문에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드물었다.


‘하긴...난 평범한 여대생이었으니까.’


늘 기사에는 고 상무, 연예인 출신이던 그의 사진만이 올라왔을 뿐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찍힌 자신의 얼굴은 눈이 퉁퉁 부어 있어, 누가 보더라도 그녀임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지배인이 친절한 손짓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네? 아...네.”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자 지배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입니다. 13층까지 올라가면 스위트룸이 두 개 나오는데, 하나는 회장님, 하나는 큰 사모님이 사용하십니다.”


“회장님?”


순간 연두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혹시라도 고 회장과 마주치는 건 아닐까? 그가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있다는 걸 알면서도 긴장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지배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께선 지금 병원에 계시다고...”


연두는 서둘러 답했다.


“네, 그래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걱정 감사합니다.”


그녀 스스로도 놀랄만큼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가슴 속은 두근거림으로 소란스러웠다.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명목상의 시아버지.

고언과의 불화설이 퍼질대로 퍼져 지배인에게서 그의 소식을 듣는다는 게 조금은 꺼림직했다.


띠링-


“자, 이쪽으로...”


엘리베이터가 금새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벽은 아이보리빛 대리석으로 반짝거렸고, 은은하게 번지는 조명은 공간을 장엄하게 물들였다.


‘아주 대리석에 환장한 집안이구만. 해외에서 단체 구매라도 했나?’


연두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고 상무의 집에서 매일 닦아내던 대리석 바닥이 떠올라 이제는 보기만 해도 지겨웠다.


“여기가 사모님이 묵으실 스위트룸입니다.”


지배인이 설명했다. 마주한 두 개의 문. 지배인은 덧붙였다.


“복도 반대편은 회장님 스위트룸입니다.”


“네? 아...”


연두는 무심코 맞은편 문을 힐끗 보았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띠로리- 철컥-


스위트룸의 문이 열리자, 연두의 눈앞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호화로운 객실이 펼쳐졌다.


“우와...”


탄성이 절로 새어나왔다. 100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공간.

바닥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렸고, 벽마저 같은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었다.


“큰 사모님 취향으로 꾸민 거라 작은 사모님께도 맞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엄청 화려해요! 벽도 같은 대리석으로 만든 건가요?”


“네, 채취할 때부터 금이 박혀 있는 대리석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소량만 생산되는 거라 금값보다 비쌉니다.”


“와...”


연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마다 달린 조명에는 크리스털 구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은은한 빛이 반짝이며 흩어졌다.


응접실에는 엔틱 가구와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마치 소 몇 마리의 가죽을 모아 만든 듯 거대하고 묵직했다.


“이쪽은 응접실, 안쪽은 침실, 욕실. 화장실은 각각 한 군데씩 있습니다. 웰컴드링크와 미니바 모두 준비되있고,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 우선 샴페인과 과일, 다과류 정도만 준비해 놨습니다.”


커다란 소파와 엔틱 가구들이 연두의 눈에 들어왔다.


“와!”


“모두 이태리 장인이 만든 가구와 소파입니다. 주문 제작에만 3년 이상 걸린 명품들이죠.”


지배인의 말은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연두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본 순간 감탄이 터졌다.


“헐...여긴 층고가 엄청 높네요?”


응접실 위에 달린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중세 유럽 왕궁의 연회장에서 그대로 옮겨온 듯했다.


“테라스로 나가시면 수영장을 바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수영장까지?”


촤악-


커튼이 젖히자 파란 수영장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마치 작은 호수처럼 넓은 풀장.


“와, 수영장에 100명은 들어가고도 남겠네요!”


“수영장 말고도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인터폰으로 0번만 누르시면 됩니다. 입이 무거운 직원들이라 쓸떼 없는 얘기는 새어나가지 않을 겁니다.”


지배인이 돌아서려던 순간, 연두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지금...룸서비스라도 보내드릴까요?”


“아, 네! 그리고...와인도 좀...”


지배인은 웃으며 특별 메뉴에 맞는 와인을 준비해주겠다고 했다.


철커덕-


문이 닫히자 연두는 두 팔을 벌려 외쳤다.


“꺄악! 해방이다!”


지긋지긋한 가정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이젠 집에 다신 안 들어갈거야. 너랑 끝이라고, 고상무!”


푸욱. 연두는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온몸을 감싸안았다.


30분 쯤 지났을까? 초특급 룸서비스가 스위트 룸으로 도착했다. 랍스터 구이와 양갈비, 아스파라거스가 아름답게 차려져 있었다. 디저트는 에그타르트와 마카롱, 티와 함께 프랑스 와인까지 곁들여졌다.


“오늘 특별 메뉴는 랍스터 구이와 상큼한 레몬 소스, 어린 양 갈비살 스테이크와 구운 가지, 마라 소스를 곁들인 아스파라거스입니다.”


“와, 맛있겠다!”


“후식은 유기농 달걀로 만든 에그타르트와 천연 색소 마카롱, 그리고 티는 영국산 블랙로얄티로 준비했습니다. 와인은 프랑스산 샤또마고입니다. 천천히 맛있게 즐기십시오. 그럼 이만.”


연두는 음식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와인잔을 조심스레 들었다. 그리고 와인 한 모금을 들이키자 입안 가득 향긋한 풍미가 퍼졌다.


“캬, 이 맛이야. 입에서 살살 녹는 구나!”


랍스터를 한입 베어물자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스트레스로 쌓였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취기가 올라왔을 무렵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벨렐렐레-


‘응? 장 감독님?’


연두는 놀란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마리씨! 나 장 감독인데!”


그의 말은 다급했다. 촬영 일정이 당겨졌다며 출연 여부를 빨리 결정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촬영 일정이 앞당겨졌어. 앞에 방영됐던 드라마가 시청률이 저조하다고 단축되는 바람에 우리 드라마가 일찍 시작하게 될 것 같아. 어떻게...생각은 잘 해봤어?”


“그게...”


연두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마음을 굳혔다. 다시 고 상무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정신병자, 싸이코, 또라이, 완벽주의자!’


온갖 안 좋은 건 다 갖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악독한 놈!


‘그에게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가정부, 노예, 유령,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바엔 차라리!’


“할게요! 감독님, 저 출연할게요!”


“하하! 마리씨 잘 생각한거야! 그럼 내일 모레 의상 피팅 있으니까 방송국으로 나와. 의상팀장한테 연락해놓을게!”


“네! 감사합니다!”


결국 그녀는 여주인공을 승낙하고 말았다. 술기운에 한 선택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어쩌면 새로운 길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


다음날 아침, 연두는 거울 앞에서 비명을 질렀다.

충혈된 눈, 퀭한 얼굴, 다크서클까지.


“으악, 얼굴이 이게 뭐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넓디넓은 100평 스위트룸. 혼자 있자니 밤새도록 공포가 몰려왔다.


깊은 밤, 수영장의 조명이 꺼지면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어두운 그림자. 수면에서 들려오는 철썩거림, 새벽의 바람이 몰고 온 서늘한 기운.


“여기가 바닷가도 아니고...”


그녀는 불평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결국 아침이 밝자 연두는 결심했다.


“방을 바꿔달라고 해야겠어.”


알딸딸한 정신으로 안내 데스크에 내려갔을 때, 직원은 정중히 미소 지으며 물었다.


“사모님, 잘 주무셨어요?”


“아뇨...”


연두는 어색하게 웃었다.


“방을 좀 바꿔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그 순간, 지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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