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연두는 지배인의 시선을 받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좀...넓은 방이 불편해서요. 수영장도 그렇고, 저 혼자 있기엔 너무 넓어요. 직원분들이 매일 청소하실텐데 그것도 불필요할 것 같아서...”
그녀의 설명을 들은 지배인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런 거라면 적당한 방을 알아보겠습니다. 우선은 스위트룸에 계시다가 오후 3시쯤, 체크아웃 시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연두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작은 배려라도 받는 듯해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리고 안내데스크에 있던 여직원이 덧붙였다.
“마사지는 어떻게 할까요? 이것도 큰 사모님이 부탁하신 건데...”
“네?”
연두가 눈을 크게 뜨자 지배인이 부드럽게 설명했다.
“저희 호텔에서 운영하는 고객 관리 서비스입니다. 피부 관리부터 체형 교정까지 해주는 전신 마사지 서비스죠. 한 번 받아보시겠습니까? 고객분들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입니다.”
연두는 잠시 고민하다 거울 속 자신을 떠올렸다. 어제 과식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 밤새 뒤척이며 푸석해진 피부.
내일 방송국에서 있을 의상 피팅이 걱정되던 차였다.
“그럼...한 번 받아볼게요.”
지배인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지사는 방으로 올려보내겠습니다.”
잠시 후, 스위트룸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마사지사가 들어왔다.
“어머, 사모님 피부가 정말예술이다!”
“정말요?”
연두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보들보들 아기 피부 같아요! 고 상무님은 좋으시겠다. 큭큭.”
“그...그러게요. 하하.”
연두는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론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얼굴 관리를 마친 뒤, 그들의 손길은 팔과 다리, 전신으로 이어졌다. 근육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압력에 연두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흠...잠이 오는데?’
드르렁- 쿨쿨-
그녀는 그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작은 사모님이 어제 잠을 못 잤나보네.”
“시댁에 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어련하겠어?”
잠결에 들려온 목소리는 희미했다. 뜻을 다 알아차릴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한 불안감이 가슴 어딘가에 내려앉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연두는 번쩍 눈을 떴다.
“내 족발! 족발 내놔!”
‘헉!’
꿈이었다. 자신이 외친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방안은 고요했고 마사지사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녀는 화장대 앞으로 가서 거울 속 얼굴을 확인했다.
“헉, 그런데...이게 나야?”
피부는 환하게 빛났고, 피로가 가신 듯 얼굴이 맑아졌다. 민낯임에도 화장한 것처럼 화사한 빛이 돌았다.
“얼굴빛이 바뀌었네? 아, 피로가 싹 풀렸어!”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사라진 듯 가벼웠다.
“그러고 보니...내일 방송국도 가야되는데, 화장품을 더 사야하지 않을까?”
화장대 위 파우치 속에는 몇 가지 화장품뿐. 그러나 고 상무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그때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짠! 만능 카드! 어머님께서 주신 카드가 있다 이거야!”
연두는 활짝 웃으며 옷을 갈아입고 호텔 앞 백화점으로 향했다.
**
연두는 S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와! 이거 사야 돼!”
쿠션과 아이라이너를 집어 들며 탄성을 질렀다.
피부 결에 촉촉이 스며드는 쿠션, 48시간 워터프루프 아이라이너.
“이거 완전 문신이구만. 문신이야.”
마스카라, 립스틱, 아이브로우까지 고급진 화장품을 한아름 샀다. 이어 패션 매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연두가 한 매장에 들러 한눈에 반한 노란색 쉬폰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이거 입어 볼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연두의 두 손에 잔뜩 들려있는 명품화장품 쇼핑백에 매장 직원은 거물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점원이 감탄을 터뜨렸다.
“고객님, 정말 잘 어울리세요! 이 원피스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손님은 처음 봤어요!”
“정말요?”
“근데 고객님 얼굴...어디서 본 듯한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죠?”
“네? 설마요...”
연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헉, 들킬 뻔했다!’
“얼른 계산해주세요. 옷은 입고 갈게요!”
쇼핑을 마친 그녀는 백화점 지하 맛집으로 내려가 돈가스를 주문했다.
“와, 맛있겠다!”
얼른 SNS용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두툼한 돈까스를 입안 가득 넣었다.
“아, 진짜 꿀맛이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백화점을 나선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띠링-
화면에 떠있는 한통의 문자.
[W호텔입니다. 고객님의 객실이 1302호에서 709호로 재배정 되었습니다. 카드키는 안내데스크에서 교환 부탁드립니다.]
“아, 드디어!”
연두는 발걸음을 재촉해 호텔로 향했다.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순간, 무심코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13층으로 향하게 됐다.
“여긴?”
그녀의 방이었던 스위트룸 앞.
무의식 중에 잘못 온 것을 알고 돌아서려는 순간, 맞은 편 회장님 방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
“방을 바꿨다고?”
그리고 지배인의 낮은 대답.
“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남녀의 대화가 새어나왔다.
“카드 내역을 보니, 지금 환장하고 쇼핑하나 보네.”
‘헉! 저건 내 얘기 아닌가?’
연두는 놀란 마음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그깟 여자애 하나 감시 못해서 되겠어?”
“죄송합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명희의 차갑고 날카로운 말소리에 연두는 두 귀를 의심했다.
‘평소의 다정한 시어머니가 맞는 걸까?’
“고 상무가 어디서 이상한 여자애를 데리고 왔다 싶었는데,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아. 불화설이 있긴 하지만, 집안 재산이나 회사 지분엔 눈독 안 들이는 것 같고.”
연두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스타트업은 어떻게 됐습니까?”
심각한 지배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고 상무네 회사? 내 지분 넘겨주고 밀어줬는데, 그게 주주들까지 설득해서 지 지분 다 챙겨서 나갔어. 제일건설에서 손 떼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사회랑 주주들한테 눈도장 제대로 찍었지. 갈수록 가관이야. 호텔 경영권이랑 이쪽 지분, 자기 친엄마 소유였단 거 알면 내 몫까지 뺏으려 들텐데...어떡하지?”
‘헉! 어머님이 고 상무 친엄마가 아니었어?’
충격이 몰려왔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쪽 경영진들은 제가 다 꽉 잡고 있으니.”
지배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쿵쾅- 쿵쾅-
연두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건 또 뭐야. 일이 어떻게 된 거야!’
명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암튼, 내 며느리 잘 감시해! 제일건설 얼굴에 먹칠하는 일 있으면 내 경영권도 그렇고, 오너 리스크도 커질 거야. 어딜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나한테 즉시 보고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사모님.”
연두는 숨이 턱 막혀와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이건 어머님이 아닐거야. 내가 아는 어머님이 아닐거야.’
그녀는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709호로 들어갔다.
“허억! 허억!”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순간, 경악과 혼란이 밀려왔다.
‘고 상무, 그 사람...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
한편 고언의 집에선 깨진 도자기 파편이 바닥에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구겨진 사진을 손에 쥐고 애타게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벨렐렐레-
“여보세요.”
“상무님! 찾았어요! 서연두씨 입원 기록!”
김 변호사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2007년 4월 13일, 올림픽공원 근처 참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을 당시 뇌출혈, 두개골 골절, 팔과 다리, 가슴뼈 등 19군데 골절, 내장과 근육 다발성 출혈. 거의 죽다 살아났는데요?”
“원인이 뭐래?”
“진단서엔 추락에 의한 사고라고만 되어 있는데...수상한 점이 많아요. 환자 기록이 거의 없고, 당시 담당의사는 다른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연락처나 주소, 개인 신상이 하나도 없어요.”
“수상한데...”
고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13년 전, 자신이 직접 확인했을 땐 그런 환자가 없다고 했었다.
“상무님, 그리고 이사회 명단 중에...”
“병원 이사회?”
“네, 사모님 이름이 있어요. 이명희.”
“뭐?”
고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인적사항이나 생년월일, 개인신상이 모두 이명희 여사가 맞습니다. 알고 계셨어요?”
“아니.”
“자료를 좀 찾아보니까 얼마 전 병원에 지분 투자하고 병원장 통해서 이름을 올린 것 같습니다.”
“그 담당 의사나 찾아봐. 사고 원인을 알아야 하니까.”
“네.”
전화를 끊은 뒤, 고언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추락사고. 우연일 수도, 누군가의 의도일 수도 있었다.
만약 서연두가 진짜 그 소녀라면...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왜...넌 날 알지 못하니. 난 이렇게 널 그리워하는데.”
혹시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이 있는 걸까? 그때 마침 한남동 저택의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철커덕-
문이 열리자 연두의 엄마, 영자가 서있었다.
“고 서방!”
“어...어머님!”
“연두는?”
“쇼...쇼핑갔어요.”
그는 순간적으로 둘러댔다.
“아, 그래? 그럼 오래 걸리겠네. 이거나 받게!”
그녀는 김치가 담긴 무거운 통을 내밀었다.
“이건?”
“오이소박이랑 총각김치. 고 서방 이거 좋아하잖아.”
고언은 김치통을 받아들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영자의 눈길은 곧 집안 곳곳을 훑었다.
“이노무 지지배가 청소나 열심히 하랬더니, 집안 꼴이 이게 뭐야!”
“그냥 두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우리 연두가 속 썩이진 않지?”
“네? 아, 네...뭐.”
“걔가 살림을 하던 애가 아니라서 음식 같은 건 할 줄도 몰라. 안 그래도 고 서방 얼굴 보니 더 마른 것 같네. 밥도 못 얻어먹는 것 같고. 내가 밥 좀 해주고 가야겠다. 근데 얘는 뭔 쇼핑이야! 전화도 안 받고!”
고언은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어머니가 들고 온 작은 앨범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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