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진실

18

고언은 어머니가 내민 앨범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가 주방에 들어서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향긋한 밥 냄새가 부엌을 채웠다.


그러나 고언의 주된 시선은 오롯이 앨범에 꽂혀 있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첫 장을 넘길 때, 마치 오래된 봉인을 푸는 듯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아, 이거? 얼마 전에 연두가 갑자기 앨범 얘기를 하더라고. 안 그래도 고 서방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사진 몇 개 골라서 가져왔어. 밥 차릴 동안 식탁에서 보고 있어. 내가 금방 밥 차려줄게.”


“아...네...”


영자의 말에 그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선은 앨범에, 마음은 과거의 문턱에 걸려 있었다.


한 장을 넘기자, 살이 토실토실 오른 아기가 눈에 들어왔다. 까만 단추 같은 눈, 동그랗게 오른 볼살.


“어릴 땐 우리 애가 되게 통통했어. 태어났을 때도 3.5키로. 여자치곤 우량아였지.”


영자의 자랑 섞인 목소리에 고언은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돼지네...’


그러나 눈길은 사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분명 사랑스러웠고, 그 순수한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었다.


사진이 바뀌며 점차 자라나는 연두의 모습이 보였다. 앨범을 넘길 때마다 영자의 나긋한 목소리가 부엌에서 울려 퍼졌다.


“크면서도 말썽 한 번 안부리고 잘 커줬지. 중3 땐가, 큰 사고가 한 번 있었는데 그래도 그 거 빼곤 건강하게 잘 자랐어.”


그 순간, 고언의 시선이 한 장의 사진에서 멈췄다.


‘이건!’


사진 속에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하고, 눈두덩이에 초록 아이섀도우를 덕지덕지 바른 여자아이가 있었다.

빨간 한복치마와 색동저고리까지 입은 채 웃고 있는 모습.


그는 숨이 멎는 듯했다.


‘서연두...네가 정말!’


영자가 부엌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 사진 너무 귀엽지? 원래 두 장이었는데, 한 장은 없어져 버렸어. 연두가 가지고 있었는데. 이날 우리 연두 네 살 생일이었거든. 갑자기 한복을 입혀 달라더니 내 화장대로 가서 화장품을 온통 칠해가지고는.”


고언은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정말...너 인거야? 그 소녀가 너라고?’


사진 속 아이는 그가 잊지 못하는 여자 아이의 얼굴과 겹쳐졌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소녀의 모습이 점점 자라며 연두와 닮아 갔다.


똑같은 눈매,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지만 사랑스러운 표정.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그 얼굴...반짝이던 미소.’


앨범이 절반쯤 넘어갔을 때였다.

교복을 입은 소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표에 박힌 글자, ‘서연두’.


‘이럴 수가...’


그는 앨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영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이거? 이건 중학교 3학년 때. 이때 우리 연두가 학교 앞 공사장에서 사고가 난 적이 있었어. 난 이혼하고 먹고 살기 바빠서 식당에서 일하다가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세상에...얘가 죽을 지경인 거야. 온몸이 다 피투성이. 의사가 죽을 거라고 했는데, 6개월 만에 가까스로 깨어나서 어렵게 살아난 거야. 우리 연두.”


고언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결국...서연두 너였어?’


영자의 목소리는 낮지만 확실했다.


“깨어났을 땐 사고 당시 기억이 없더라고. 의사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단기 기억상실 같다고...그 사고와 관련된 기억들은 모두 지운 것 같대. 스스로.”


고언은 힘겹게 물었다.


“사고 현장엔 가보셨어요?”


“아니. 난 그냥 어떤 사람들이 치료비를 쥐여주면서 병원비는 걱정 말라고 해서. 자기네들이 다 책임진다고...식당일로 힘들어 죽겠는데 다행이다 싶었지. 그 사람들 말로는 우리 연두가 공사장에서 실수로 넘어져서 사고가 난 거래. 나도 잘못이 있지. 그땐 먹고 살기 바빠서 우리 애가 어딜 다니는지, 뭘 먹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거든.”


“본인도 그때 기억을 모르고요?”


“응. 6개월 만에 깨어나서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발작을 일으키며 힘들어했어. 의사가 그때 기억을 자꾸 떠올리게 하면 뇌손상이 올 수도 있다고 해서...그 일은 묻어 두기로 했지. 난 연두가 살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해.”


‘뇌손상이라고?’


고언의 머릿 속에서 단어가 맴돌았다.


‘그것 때문에 날 기억 못 하는 거였어?’


영자는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자네도 내가 이런 얘기했다는 거, 연두한테는 말하지 마. 아무 소리 하지말고. 어차피 기억도 못 하고, 또 발작만 일으키거나 아프기만 할거야. 불쌍한 우리 딸.”


‘네가 날 기억 못 하는 이유가 다 그것 때문에!’


그의 가슴은 조각조각 무너졌다. 숨을 내 쉴수록 가슴이 막혀와 그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영자는 문단속 얘기를 꺼내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 참! 나 집에 창문 열어 놓고 나온 것 같은데? 앨범은 두고 갈 테니까, 이따 연두랑 같이 봐. 어릴 때 너무 못 생겼다고 타박주지 말고.”


“가...가시게요?”


“어. 된장찌개는 데워서 먹고, 연두 들어오면 반찬 해놓은 건 냉장고에 넣으라고 해. 그럼 나 간다!”


“네. 안녕히...”


철커덕-


문이 닫히자, 고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에 쥔 앨범은 무겁게 느껴졌고, 사진 속의 소녀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심장이...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널 그동안 곁에 두고 어떻게 이렇게...’


그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사진 속의 소녀는 그때처럼 반짝거리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가만 안 두겠어. 이사장. 부숴버릴 거야.”


고언은 곧바로 명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틱-틱- 띠리리리리-


“어, 아들!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그녀가 전화를 받자마자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 내가 당신 아들이기나 해?”


명희는 여전히 능청스러웠다.


“갑자기 또 왜 이래? 자식 없는 나한테 아들이라곤 너뿐인데.”


“착한 엄마 코스프레, 이젠 집어치우시지?”


“뭐? 너 지금 회장님 쓰러지시고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이러는 거야?”


“13년 전 콘서트장 사고, 기억해요?”


“그 얘긴 왜 갑자기 꺼내는데?”


“분명히 그때 응급실로 실려 간 소녀는 죽었다고 했잖아! 나보고 잊으라고! 죽었다고!”


“얘가 지금 뭐라는거야? 그 아이 분명 죽었어. 내가 직접 확인도했고. 사망진단서도 보여줬잖아!”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뭐?”


분노의 대화는 거세게 이어졌다.


“솔직히 말해. 뇌사 상태로 만들고 싶었던 건 그 여자애가 아니라 나였다고!”


“언아, 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이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지도 다 알고 있어!”


“너 지금 제 정신이야? 정신과 약은 먹고 있어?”


“악마 같은 당신 때문에 내가 정신병에 걸린 거라고! 알아?”


고언은 목소리를 높였지만, 명희도 대답을 멈추지 않았다. 울분은 결국 폭발했고, 그는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퍽- 쨍그랑-


“언아! 언아!”


그는 치를 떨며 외쳤다.


“개소리 집어 치우라고!”


핸드폰은 벽에 부딪혀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명희는 분노에 찬 언을 달래주려는 식으로 목소리를 나긋하게 만들었다.


“그래. 다 엄마 잘 못이야. 미안해. 네 엄마 갑자기 돌아가시고, 내가 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 그런데 언아. 13년 전 콘서트장 사고, 그 이후에 네가 은퇴한다고 했을 때 엄마랑 아빠는 오히려 그 소녀에게 감사했어. 이런 마음 정말 미안하지만 우린 네가 회사로 돌아와서 마음잡고 일하는게...”


“그만! 그만하라고!”


“언아! 언아!”


핸드폰에선 계속 명희의 음성만 흘러나왓다.


‘이게 가려진 진실이야. 우리 제일건설가의...'


“서연두, 넌 이제 절대 놓지 않을거야.”


**

한편, 연두는 방송국 의상실 앞에 서 있었다.


“휴우...”


긴 호흡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몸은 결혼 전보다 불었고, 체중도 늘어 있었다. 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김주희 대리의 환영 인사와 함께 긴장은 조금 풀렸다.


“여기 계셨어요? 안 그래도 정문으로 마중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아, 지난번 카메라테스트 때, 의상실 지나가던 게 생각이 나서요.”


“아! 그러셨어요. 덕분에 수고 덜었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네.”


방송국 건물 두 개의 층을 이어서 만든 의상실은 올려다 보기에도 벅찼다.

하이힐을 신고온 연두의 구두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채웠다.


또각-또각-


“와, 여기 정말 넓네요.”


천장이 높게 뚫린 의상실은 마치 또 다른 세상이었다. 2만 벌이 넘는 의상이 빼곡이 걸려있었고, 의상들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저희 방송국이 보유하고 있는 의상만해도 2만 여벌 정도 될 거예요. 거기다 의상 협찬이나 새로 제작되는 숫자를 따지면 훨씬 더 많죠.”


‘헉! 2만 여벌! 그래. 이 많은 옷들 중에 나한테 맞는 옷이 하나쯤은 있겠지?’


그러나 주희의 설명은 연두의 마음을 다시 무겁게 만들었다.


“사실 이번 드라마 의상은 외부에서 협찬 된 거라 이미 제작은 완료된 상태에요.”


“네?”


“원래 마리 작가님 전에 인현왕후 역에 캐스팅 됐던 이유빈씨 사이즈로 맞춰놨던 거라, 아마 팀장님이 좀 번거로워 하실 수도 있어요. 다시 작가님 사이즈에 맞춰서 일일이 수선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워낙에 꼼꼼하셔서...”


‘이유빈...이라고? 그 유명 배우 권미라의 딸, 이유빈? 그 배우 엄청 말랐잖아!’


연두는 속으로 절망했다.


‘헉. 큰일이네. 이러다 의상 모두를 다시 제작할 수도 있겠어. 천이 더 많이 들거야. 젠장.’


“아! 저기 팀장님!”


“어디요?”


“저쪽에 사극 의상 파트에 계신, 삭발머리 남자분이 의상팀장님이세요. 제가 우선은 잘 얘기 해놨으니까. 오늘은 의상 피팅만 하고 돌아가시면 되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연두는 주희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의상실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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