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황팀장이 나타나자, 연두는 조심스레 인사했다.
“안...안녕하세요?”
“아! 주희씨가 얘기했던 그 분? 새로 여주인공에 캐스팅 되신 분?”
“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의상팀장은 어딘지 말투가 여성스러웠다.
“보조! 여기 피팅 직원들 다 어디갔어?”
“네? 부르셨어요.?”
“어! 의상들 좀 갖고 와봐.”
그리고 잠시 뒤 행거에 걸린 휘황찬란한 인현왕후의 의상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연두는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반짝이는 한복에 취해버렸다.
‘우와!’
“오늘은 우선 치수점검이랑, 의상 색깔이 피부톤에 잘 맞는지만 볼 거니깐. 음...이 옷이 좋겠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고, 곧 한 벌의 옷을 집어 들었다.
“이게 인현왕후가 평상시에 입을 한복이야.”
연둣빛이 감도는 에메랄드 당의와 오렌지빛 치마. 금박으로 수 놓은 옷은,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화려했다.
“와, 예쁘다...”
연두는 조심스레 속삭였다. 황팀장이 손을 휘저으며 뒤편을 가리켰다.
“의상 갈아입는 피팅룸 있으니까, 갈아입고 와 봐.”
연두는 긴장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잘 맞아야 할텐데.’
한복은 원래 좀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피팅룸 앞에 서서 조심스레 노크했다.
똑똑-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손잡이를 잡아 돌려 보았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어? 문이 안 열리잖아?’
순간 불안이 몰려왔다. 이대로 옷을 갈아입지 못하면 어쩌나.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눈길을 사방으로 돌렸다. 피팅룸 옆으로 길게 걸린 의상들, 그 뒤편에 어둑한 공간이 보였다.
긴 치맛자락들이 늘어져 작은 막처럼 드리워져 있던 공간.
‘어떻게 하지? 그래! 저긴 아무도 보지 않겠지?’
결국 연두는 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숨소리가 의상더미에 막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녀는 급히 한복 치마를 둘러 입었다.
바스락- 바스락-
의상들끼리 스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아오...’
속으로 내뱉는 짜증 섞인 말에서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옷감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공간은 꽤 비좁았다. 치마의 가슴띠를 감아 매며 그녀는 잠시 멈췄다.
‘이게...여기서 끝나는 게 맞나?’
왠지 한 번 더 단단히 동여매야 할 것 같았다. 가슴을 조여 매는 순간, 호흡이 가빠졌다.
그때 피팅룸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게 말이 돼?”
“뭐가?”
보조 직원 두 명의 목소리.
“어떻게 이유빈이 밀리고 저런 듣보잡 여자가 주인공을 꿰찰 수 있지?”
“작가라며? 얼굴은 조막만 한 게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더라.”
“원래 저런 애들이 더 밝히는 법이야.”
연두의 가슴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뭐지? 지금 내 얘기하는 건가?’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가차 없이 이어졌다.
“저 여자 벌써 장 감독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난 카메라 감독이랑 썸 탄다고 들었는데?”
‘헐. 설마? 나에 대한 소문?’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튼 이유빈보다 돼지같이 살쪄가지고 의상팀만 노가다하게 생겼잖아. 완전 우리만 개고생이지.”
“그러게. 이 드라마 망할 것 같아. 여주인공이 저 모양인데.”
그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연두는 숨을 크게 들이쉬지 못했다. 그리고 금세 눈동자가 흔들리며 눈물이 흥건하게 고였다.
자신감이 바닥나던 순간, 피팅룸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팍-
그리고 한 남성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피팅룸이 남 뒷담화 하는 곳이었나?”
직원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핫, 여기 계셨어요?”
“권...성훈씨?”
연두의 눈이 커졌다.
‘권성훈?’
수영선수 출신으로 잘생긴 얼굴과 큰 키, 다부진 체격때문에 여성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남자배우.
피팅룸에서 그가 나온 순간, 순식간에 주변 공기를 장악했다. 직원들은 당황했다.
“남자 배우분들 피팅은 벌써 끝난 줄 알았는데...”
그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내가...살이 좀 쪘거든.”
연두는 숨을 죽였다.
‘뭐지? 저 사람? 이번 드라마에 나오는 건가?’
성훈은 직원들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원래 배우들 상황에 따라 의상 수정하고 피팅시켜주는 게 의상팀이 할 일 아닌가? 이번엔 협찬이라 직접 제작도 아니고, 수선만 하면 되는 걸로 아는데?”
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더 깊게 내려갔다.
“이 드라마, CBC에서 처음 시도하는 사극이라고 엄청난 투자가 들어간 걸로 아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망한다는 소문을 퍼트리면 어떡합니까? 이거 팀장님께 얘기해도 돼요?”
직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말실수를...”
“제발 팀장님께는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성훈은 날카롭게 손가락으로 다른 구역을 가리켰다.
“그렇게 걱정되면 저쪽 의상이나 챙기세요. 일손 부족하던데.”
“네.”
직원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는 동안, 연두는 여전히 옷감 속에서 몸부림쳤다.
바스락- 바스락-
훌쩍- 훌쩍-
눈물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고, 급기야 콧물까지 쏟아져 나왔다.
‘왜! 왜! 이 저고리는 내 몸에 안 들어가는거야!’
눈물과 콧물을 참으며 옷을 억지로 껴입는 순간, 높다란 2층 헹거에 걸린 의상들이 거칠게 젖혀졌다.
촤라락-
“너! 누구야!”
성훈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연두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소리쳤다.
“흐흑. 옷이 안 들어가욧!”
그는 잠시 멈추더니, 입술 끝을 떨었다.
“큽...풉....”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흐윽. 웃지 마세요...”
연두는 울먹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속으로 소리쳤다.
‘저고리가 안 들어간다고! 이 양반아!’
성훈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이리로 나와요. 거기 먼지 많아요.”
그가 내민 손은 크고 따뜻했다.
연두는 망설이다가 결국 그의 손을 잡고, 옷더미를 폴짝 뛰어넘었다. 순간 치맛자락을 밟으며 중심을 잃고, 성훈의 품으로 곤두박질쳤다.
“앗!”
“으악!”
쿵-
강하게 부딪힌 가슴팍에선 그의 단단한 체격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숨이 막히는 순간, 연두의 얼굴은 불에 데인 듯 달아올랐다.
그의 검은 도포는 고름이 풀려 맨살이 드러났고, 그녀의 저고리 역시 헐겁게 흘러내려 있었다.
‘이 묘한 분위기, 뭐지?’
두 얼굴이 가까워지자, 뜨거운 공기가 서로의 호흡에 실려 스쳐갔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황 팀장의 고함이 공간을 찢었다.
“이것들! 여기서 뭐해! 옷 갈아입고 얼른 오랬잖아!”
둘은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지금 갑니다!”
그와의 첫만남은 그렇게, 황당한 우연 속에서 시작됐다.
**
피팅을 마치고 나온 연두에게 황 팀장은 감탄을 터뜨렸다.
“와우, 브라보! 마리씨, 너무 예쁘다. 한복이 정말 잘 어울려!”
‘흡....’
연두는 숨을 한껏 들이 쉬고 저고리 고름이 풀리지 않게 계속 숨을 참고 있었다.
마침 황 팀장 옆에 있던 정 실장이 맞장구쳤다.
“팀장님, 예전에 고현진씨 생각 안 나세요? 신라의 여왕 때도 그랬잖아요. 한복이 너무 잘 어울려서 다들 기절할 뻔 했다고.”
‘저 분은 누구시지? 한복 협찬사에서 나오셨나?’
“머리칼도 까만 게 한복 색깔이 확 사네!”
연두는 칭찬 속에서도 숨을 크게 들이쉬지 못했다. 고름이 풀어질까봐 온몸을 잔뜩 움츠리고, 갈비뼈는 가슴띠에 눌려 숨이 막혀왔다.
황팀장은 신나서 소리쳤다.
“지난번 유빈씨한테 입혔을 땐 이런 아우라는 없었어.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귀티! 인현왕후의 환생처럼!”
정 실장이 맞장구쳤다.
“장 감독이 왜 갑자기 캐스팅했는지 알 만 하네요.”
그러나 곧 냉정한 말들이 이어졌다.
“여주인공님이 살만 좀 빼주면 수선도 필요없겠는데...”
황 팀장이 손짓을 하며 말했다.
“마리씨, 우리 5키로만 빼자. 그럼 화면에서 훨씬 더 예쁘게 나올거야.”
연두는 억지 미소로 대답했다.
“네.”
속으론 이를 악물었다.
‘오늘부터 다이어트다! 술도 끊고 야식은 금지야!’
“음...오늘은 이만하면 된 거 같고.”
“황 팀장, 우리 홍보자료로 좀 쓰게 이 분 사진 좀 찍어 가도 되죠? 두어 장만 찍어 갈게요.”
‘사...사진이라고?’
분명 협찬사에서 자신들의 한복이 드라마 제작에 쓰였다며 연두의 사진을 사용하기 위해 찍어간다는 것이었다.
“정 실장도 참. 당연하지! 이렇게 예쁜데!”
찰칵- 찰칵-
‘하핫. 그럼 저 한복 가게에 내 얼굴이 걸리는 건가?’
“그럼 마리씨, 이제 다 끝났으니까 옷 갈아입고, 의상은 저쪽에 있는 직원들한테 맡겨 놓고 가요.”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사진 촬영까지 끝나자, 그녀는 가까스로 옷을 벗고 밖으로 나왔다.
“휴우, 죽을 뻔 했네.”
그 순간, 다시 나타난 성훈이 연두를 부드럽게 불렀다.
“저, 마리씨.”
연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분이 왜 여기에? 설마 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거야?’
“왕비를 사랑한 저승사자, 원작자님 맞으시죠?”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네. 맞아요.”
만화에서 나온 듯한 비주얼, 성훈을 향하는 연두의 눈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데 이 배우, 보면 볼수록 정말 잘 생겼네! 꼭 만화에서 나온 사람 같아. 만.찢.남! 어깨도 넓고, 키도 크고. 키는 고 상무랑 비슷한데? 187이라고 그랬나? 아무튼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쌍꺼풀도 짙고. 그런데 이 사람...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진거야?’
성훈은 부끄럽게 웃으며 고백했다.
“저 사실 그 작품 팬이에요.”
순간, 연두의 눈이 커졌다.
‘네? 팬은...제가 권성훈씨 팬인데...’
“장 감독님은 좋은 분이에요. 이상한 소문은...신경쓰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는 짧게 응원의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연두는 뒤돌아 가는 그를 다급히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
그러나 그는 이미 멀어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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