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사슴 표정

20

방송국 밖.


어둑해진 하늘, 연두는 정문 앞으로 걸어나오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싸인도 못 받았네.”


지하철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그녀는 온통 성훈의 얼굴만 떠올렸다. 날카로운 콧날, 붉어진 귀, 크고 따뜻한 손.


‘근데 너무 잘 생겼잖아! 완전 실물 깡패!’


몽롱한 기분에 젖어 웃음이 새어나온 순간, 지하철역 안내 방송이 들렸다.


[옥수, 옥수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으악!”


연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W호텔이 있는 역은 지나쳐버렸고, 도착한 곳은 고 상무의 집이 있는 역.


‘젠장, 혼자 이상한 상상하다 여기까지 와버렸네.’


“여기 온 김에 짐이나 챙겨갈까? 그래, 이왕 끝낼 거 깨끗하게 끝내는 거야!”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발걸음을 옮겼다.


**


현관 비밀번호 풀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띠로리- 철커덕-


연두는 문틈으로 거실의 기척을 훑었다.


‘아무도 없지?’


현관엔 고언의 신발도 없었고, 소파에는 접힌 담요만 가지런했다. 다행히 고 상무는 출근한 듯 보였다.


‘짐이나 챙겨서 빨리 나가야겠다.’


아무도 없는 집. 누군가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는 발걸음으로 계단에 무게를 실었다.


쿵-쿵-쿵-


계단을 올라 3층 복도를 지나며 챙길 물건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방 문 앞에 다다르자 문손잡이를 돌렸다.


철커덕-


문이 살짝 열리면서 익숙한 냄새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쏟아졌다. 그리고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연두는 몸이 굳어버렸다.


‘고...고 상무?’


창가 쪽 반그늘에 그가 서 있었다. 미동 없는 어깨선은 어째서인지 한참동안 그녀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


‘왜 여기에?’


그녀의 의문이 끝나기도 전, 그의 발걸음 소리가 짧게 울렸다.


타박- 타박-


척-


그가 성큼 다가와 연두를 와락 끌어안았다. 망설임 없는 팔뚝의 힘이 연두의 몸을 힘차게 조였다.


“보고...싶었어.”


그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지 않았지만 말끝이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스웨터에서 나는 산뜻한 비누향.

그 향기에 심장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두근- 두근- 두근-


하지만 빛의 속도로 떠오른 건 며칠 전의 싸움.


[쨍그랑-]


도자기가 깨지던 소리, 그리고 ‘이 사진이 정말 네 거냐고!’ 내리꽂히던 목소리.

연두는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을 밀쳤다.


타앗-


“오늘 왜 이래? 술 마셨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밀려온 그의 행동을 매몰찬 어조로 떨쳐버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달랐다.


“보고 싶었어, 서연두.”


고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선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손등의 온기가 닿은 곳마다 미세한 전류가 일었다. 그리고 그의 눈언저리는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

현관 앞에서 본 적 있는, 슬픈 사슴 표정.


‘안 돼! 서연두! 여기에 정신을 놓으면 안 돼!’


그녀는 스스로를 다그치듯 고개를 돌렸다.


“당신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오늘 또 외로워?”


그의 손등을 쳐내며 한 걸음 물러선 뒤 옷장을 열어 트렁크를 꺼냈다.


철컥- 드르럭-


레일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장롱 밖으로 커다란 트렁크가 나왔고, 연두는 가방 안에 노트북, 세면도구, 파우치, 옷가지를 부지런히 집어 넣었다.


“설마, 내가 며칠 집을 비웠다고 이러는 거야? 청소할 사람 없어서?”


연두는 가벼운 조롱으로 그에 대한 떨림을 숨겼다. 그때 가느다란 손이 내려와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나...너, 많이 보고 싶었어. 그동안...”


그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짧은 흐느낌.


흐흑-


연두가 고개를 들었을 땐, 그의 눈가가 이미 젖어 있었다.


“그리웠어...많이.”


그의 손끝이 연두의 머리칼을 정돈하듯 쓰다듬었다.


대체 자기가 없는 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연두는 그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감정은 늘 온탕과 냉탕 사이를 정신없이 왕복했고, 그 사이에 그녀는 늘 얼어붙곤 했다.


[“2층에서 내려오지 말랬잖아! 청소는 다 했어?”]


마치 노예부리 듯 주인처럼 다그치는 말들이 번개처럼 스쳤다. 고함과 일그러진 일상, 머리카락을 훑는 소름이 마음 속 온기를 가라앉혔다.


“그래서?”


연두는 트렁크 덮개를 눌러 닫으며 말했다.


“나, 여기서 나갈 거야. 이제 이 집도 필요 없어. 당신도, 계약결혼도.”


말이 입술을 빠져나가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통쾌하게 후련했다.


“그게...무슨 말이야? 난 이제야 널 찾았는데. 바보같이, 곁에 두고도.”


그의 눈동자 위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눈물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연두는 그 눈물을 보고서도 등을 홱 돌려버렸다.


“우리 이혼해. 지금 당장.”


그녀는 차갑게 말끝을 잘랐다.


“뭐?”


고언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튕겨나왔다.


“계약결혼, 없던 걸로 해! 당장! 깨끗하게 정리하자고.”


그녀는 폭탄 같은 말을 차분히, 그러나 확실히 내뱉었다.


“가지마! 다신...널 놓을 수 없어.”


언의 팔이 연두의 허리를 뒤에서 감았다. 숨 막힐 정도의 힘. 그의 단단한 팔뚝이 느껴졌다.


“제발 가지마.”


그리곤 그의 뜨거운 눈물이 연두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목덜미를 지나 쇄골로, 순식간에 작은 폭포처럼 그의 눈물이 계속 쏟아져내렸다.


‘이 남자 왜 이러지?’


연두의 머릿속에는 가능한 설명들이 후르륵 떠돌다가 사라졌다.

그는 절박했고, 그 절박함은 그녀의 허리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연두는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왜 이래? 이게 당신이 바라던 바 아니었어? 나 쫓아내는 게 당신 목표였잖아. 그러니까 이 손, 놓으라고!”


그녀가 허리춤에 있던 고언의 팔을 뿌리치자, 그의 힘이 잠깐 풀렸다가 다시 이내 허리를 더 강하게 옥죄여왔다.


“제발...같이 있어줘. 부탁이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표정은 애원으로 일그러졌다. 연두는 그의 팔을 밀쳐내고 트렁크 손잡이를 확 당겼다.


“위자료 때문이야? 합의금 주기 싫어서? 아니면 남은 계약기간 동안 날 더 부려먹으려고?”


계속 쏟아지는 경계심으로 그를 등지고, 3층 복도를 지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현관 앞에서 고언은 마지막으로 연두의 손목을 거머쥐었다.


“제발...가지마. 부탁이야.”


떨리는 손, 그녀의 손등을 타고 전해지는 체온. 하지만 연두는 멈추지 않았다.


“이혼 준비나 잘 해놔. 3달 기다려 줄게. 계약 끝나는 날까지.”


그리고 연두는 현관문을 열었다.

캐리어 바퀴가 임계점을 넘기듯 문밖으로 향했고, 대문을 나왔을 땐 그녀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훗. 웃기시네. 어디서 개수작이야! 미친, 또라이, 왕재수, 싸이코.”


불쾌함을 너머 무언가 뜨거운 울음이 넘어 오려 했지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계약결혼 3년, 정확히는 2년 9개월.


계약종료를 3개월 앞둔 시점에 얻은 자유. 그녀는 다신 이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연두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캐리어 바퀴는 제멋대로 굴러갔다.


드르륵- 덜컹- 덜컹-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이 마치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


늦은 저녁, W호텔 709호.


카드키의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문이 열렸다.


띠릭- 철커덕-


덜그럭 거리던 캐리어 바퀴가 카펫을 헤치며 방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드르륵- 덜컹- 덜컹-


연두는 두 손으로 캐리어 손잡이를 집어 넣고, 그대로 침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철푸덕-


“아이고, 짐 끌고 오느라 개고생했네.”


숨을 고르다가 슬쩍 화장대 쪽을 바라봤다.


‘어? 여기 있던 내 짐들 다 어디갔지? 백화점에서 산 화장품, 확실히 이 위에 올려놨는데? 혹시 노란색 원피스도?’


철컥- 촤락- 촤라락-


옷장 문을 급히 열고 옷걸이를 훑어 봤음에도 새로 산 원피스는 보이지 않았다.

연두는 곧장 안내데스크에 전화를 걸었다.


“네, 709호인데요. 제 물건이 없어져서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직원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청소직원이 뭔가 착오를 했던 모양입니다. 전에 묵으셨던 방, 13층 스위트룸 맞으시죠? 직원이 짐을 거기에 가져다 놓았다고...금방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괜찮아요. 제가 올라가서 가져올게요.”


그녀가 전화를 내려놓는 사이 직원은 연신 사과하며 카드키를 올려보내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연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 호텔이랑은 뭐가 안 맞아.’


**


13층 복도의 공기는 더 차분했다.


웅장한 카펫과 대리석이 반사하는 조명이 바닥 위로 번졌다. 그리고 연두가 묵었던 스위트 룸은 아슬아슬하게 열려 있었다.


연두는 손끝으로 문을 살짝 밀었다.


그 순간, 창가에 선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왔어?”


‘허걱!’


몸에 남아 있던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


“고...고 상무! 당신이 왜 여기에?”


그는 와인잔을 들어 올리고, 한 모금을 목으로 털어넣고 있었다.


“짐은 직원들 시켜서 가져오라고 했는데. 709호에 있었다며.”


목소리는 차분했고, 눈빛은 아까와는 달랐다.


“당신, 어떻게 온 거야?”


연두가 묻자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내 차 타고. 퇴근시간 지나니까 차도 안 막히던데? 당연히 지하철보다 빠르지 않겠어?”


연두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난 캐리어 끌고 발바닥이 타들어가게 걸어왔는데!’


방 안을 둘러보니 그의 짐이 이미 정돈돼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고 상무...호텔에 살러왔어?”


그는 대답 대신 연두에게로 더 다가왔다.


“너랑 떨어지기는 싫고, 가지 말라고 붙잡았는데도 네가 기어코 나간다면. 내가 따라가는 수밖에.”


고언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선 순간, 긴팔을 뻗어 스위트룸 문을 닫아버렸다.


철컥-


“오늘밤, 같이 있자.”


그는 두 팔로 연두를 자신의 몸 사이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너 이제...놔주지 않을거야. 절대.”


연두의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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