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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맛탄산수 Jan 05. 2020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보이는 것들

<카카오 프로젝트100  - 걷기 학교의 랜선1만보 함께 걷기> 회고





2019년 9월 20일 ~ 2019년 12월 28일간

772,894보를 걷다


100일 만보 걷기 성적표


회사 동료들과 재미 삼아 시작한 만 보 걷기 프로젝트가 2019년과 함께 마무리됐다. 오프라인 번개 모임에서 걷기 학교 교장 선생님(하정우)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각 잡고 걷는 일상'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고 유익했다.


'걷는 사람'이 된다는 건 '오감을 통해 나의 일상을 더욱 풍부하게 가꾸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냥 한번 만들어본 결산표


만 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내 속도로 1시간을 쉬지 않고 걸으면 약 7,000보. 하루에 만 보를 채우려면 약 1.5시간을 걸어야 한다.


쳇바퀴 돌리기 바쁜 직장인에게 하루 1.5시간은 큰 비중이지만 유리병에 꽉 찬 자갈 사이사이로 모래를 채워 넣듯이 쳇바퀴 사이사이로 시간을 조각내 채워 넣으면 못 할 일도 아니다.








◆ 평일의 걷기 루틴 (평균 달성률 83.4%)

집~회사(약 3,000보)
+ 점심, 산책, 화장실 왕복 등 회사에서의 일상 걷기(약 3,000보)
+ 회사~집(약 3,000보)
+ 추가 걷기(약 1,000보)
= 10,000보

평소 하루에 약 4~5,000보를 걷고 있었던 나. 남은 5,000 여보를 채우기 위해 아래 3가지 규칙을 세웠다. 불금에 정 줄 놓고 놀다가 인증을 까먹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만, 세 가지 원칙 덕분에 평일은 꽤나 수월했다.

1. 출퇴근 시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 금지, 판교역~회사 사이는 걷기
2. 퇴근 후 샤워를 마치고 10분 정도 집 안팎 걷기
3. 새로 산 미밴드의 오래 앉음 경고 기능을 1시간 주기로 설정해 알림 때마다 잠깐이라도 엉덩이 떼기


 주말의 걷기 루틴 (평균 달성률 51.5%)

1. 개인 일정 없는 날
씻고, 밥 먹고 하는 집에서의 일상 걷기(약 500~1,000보)
+ 집 주변or공원 걷기(약 8~9,000보)

2. 개인 일정 있는 날
그날그날 다름.

계산해보니 주말의 미달성률은 평일의 2배다. 일정 없는 집순이에겐 당연한 결과긴 하다. 어디든 콕 처박혀 노트북 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겐 평일보단 주말이 훨씬 어려웠다.


어거지로 걷는 와중에 느낀 긍정적인 변화라면,

1. "주말 약속이 있는 게 좋으면서 싫은" 집순이가 약속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불러줄 때 곱게 나가자...

2. 약속이 없는 날엔 주민 패션으로 어기적어기적 동네를 탐방했다. 아기자기한 동네 가게와 걷기 좋은 길목을 발견할 때면 보물 찾기에서 1등 한 기분이었다. 금호동, 좋아.






출퇴근길,

딱딱해진 머리를 말랑하게


피식 웃음 나는 퇴근길


판교역부터 회사까지 왕복할 때가 하루 중 가장 걷기 좋았다. 예전엔 출근 전에 1분이라도 더 자려고 버스 좌석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았고, 퇴근길엔 업무 세포의 셔터를 내리고 스마트폰에 집중했던 길이었다.   


걸을 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신호등과 차를 봐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마트폰과 멀어진다. 스마트폰과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주변에 눈을 돌리거나 그마저도 재미가 없을 땐 스스로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출근길엔 오늘 날씨가 왜 이래, 판교 건물은 왜 다 똑같이 생겼을까, 오늘 회사에서 뭘 해야 했더라, 점심은 뭘 먹지, 같은 생각을 했다. 퇴근길엔 오늘 내가 왜 그랬지, 배고프다, 주말에 뭐하지, 언제까지 여기 다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진지했고 때로는 허무맹랑했다.


허무맹랑한 상상이든 진지한 고민이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도 역이든 회사든 도착하고 나면 생각의 결론을 내야 한다. 힘찬 걸음 덕분인지 대부분의 결론은 긍정적.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생각과 힘차게 내딛으며 하는 생각은 몸이 다르게 받아들인다.


본 운동 전후에 하는 준비 운동과 정리 운동처럼, 일상의 쳇바퀴를 굴려야 하는 내 머리에도 준비 운동과 정리 운동이 필요하다. 걷는 건 두 다리뿐만 아니라 머리도 튼튼하게 한다.






매일매일,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


매일 이렇게 인증을 했다


직장인과 성취감. 두 단어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입사하고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명확한 데드라인 없이 계속되는 업무 특성상 "이야!!! 해냈다!!! 해냈어!!!"의 성취감을 느끼는 건 더 어려웠다.


아무 일정 없는 날. 침대 위에 누워있다 보면 누군가 한입 베어 문 공갈빵처럼 텅 빈 속내를 들킬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카메라 앱의 필터처럼 일상 위에 은은하게 깔려있는 결핍을 해소하려고 이것저것 밖으로 눈을 많이 돌렸다. 무언가를 계속 들이붓고 다시 내뱉어댔다.  


만 보를 걷는 건 도전적이거나 진취적인 일은 아니다. 그런데 작고 소박한 이 목표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오늘도 했으니 내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걷기에서 시작된 작은 성취감은 일상의 온도를 높이기에 아주 좋은 불쏘시개였다.


여전히 공갈빵이긴 해도, 이전보다 더 두툼하고 쫄깃해졌달까.  






몸을 가볍게,

일상도 가볍게


적당히 클린하고 적당히 돼지런한 식생활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살 빠졌냐는 말을 듣는다. 온전하게 걷기 덕분만은 아니지만, 겸사겸사 일상을 가볍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지금까지 5kg가 빠졌다.


뭘 해서 살이 빠졌을까? 만 보를 걸어야 하다 보니 일상 속에서 의식적으로 조금 더 움직이게 됐고, 움직여야 하니 속이 가벼웠음 싶어 식사량과 식사 메뉴를 조절했고..... 이게 끝이네.


티셔츠 하나를 사면 거기에 어울리는 바지와 코트, 신발까지 따라 사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걷는 습관이 생기니 여기에 맞춰 먹는 것, 자는 것,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조절하게 됐다.


살이 빠지고 있는 게 느껴질 때마다 '이 기회에 각 잡고 다이어트'해볼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수차례 요요를 경험했던 몸이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싶을 땐 마셨다. 참으면 병 나.


오늘의 나는 돼지런할지언정 내일의 나는 다시 만 보를 걸어야 했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내일의 일상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잠깐의 일탈에도 다시 쉽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상의 힘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걷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롭게


도연언니 짱!

걷기에 큰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다. 걷는 건 그냥 걷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쉽게 시작할 수 있고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 그거 껌이야- 하는 그 껌 같은 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해봤자 아무거나 밖에 안 될 것 같은 이 세상 한가운데서 걷기를 통해 자유를 느낀다. 내 의지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하여 두 다리를 힘차게 내딛다 보면 세상만사 그거 아무 일도 아닌 것 같고, 어제까지 나를 괴롭혔던 모든 것들을 사뿐히 즈려밟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상 사는 게 풍선껌 부는 것처럼 쉬워 보인다.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는 그런 기분으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기분으로라도 살아내야, 이 팍팍한 일상을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걷기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나의 걷기는 계속될, 별거 아닌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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