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찬호의 «모멸감»을 읽다 말고 쓰기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타인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 그 무의식과 타성을 성찰하면서, 관계를 비인간화시키는 문화에 의식적으로 제동을 거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상화라는 말이 잘 와닿지 않았던 적이 있다. 대상화는 나쁘다고 하는데, 나쁜 대상화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누구나 누군가를 대상화한다.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대상화를 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대상화가 나쁘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된다. 감수성 없는 빡빡한 논리 일지도 모르겠다. 나쁜 대상화도 있고 좋은 대상화도 있으며 그저 그런 대상화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 나쁜 대상화가 있다.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서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배변을 참는 고문을 시켰다. 그 자체도 고통이지만, 더 큰 고통은 따로 있다. 배변을 무한정 참을 수는 없고 결국에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서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변이 튀기도 한다. 서로를 경멸하게 된다. 이 고문은 서로를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며, 대상화 중에서도 나쁜 대상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됐다. 위 예시처럼 꼭 특별한 경우에만 있는 건 아니고, 아주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일어난다. 비하, 조롱, 무시, 동정 등 다양한 방식의 모멸감을 주는 행위가 있다. 공통점을 찾자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저에 깔려 있는 건 물건처럼 혹은 짐승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대상화'가 이런 일들을 담기 적절한 말인지 잘 모르겠다. 영어의 object는 대상이라는 뜻이 있는데, 물건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objectification이라는 단어가 물건처럼 취급하는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말 '대상화'는 물건처럼 취급하는 느낌을 아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