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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습관을 버리기를

당신의 멋진 삶을 부정하지 마

by 뎁씨


최근 원룸 이사를 했는데 이걸 쓰는 와중에도 짐 정리가 한참 남았다. 짐이 얼마 없는 줄 알았는데 싸놓고 보니 구석구석 잘도 숨겨놨는지 계속 나오더라. 이렇게 나는 알 수 없는 재능을 다시금 발견했다. 짐을 정리하다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그걸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짐 정리는 미루고 가장 나답게 게으르게 그걸 해야겠다 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딴짓

19년 2월 말부터 자취를 시작했.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살다 그해 여름 독서모임이란 걸 시작하면서 자취방에도 책을 사놓기 시작했는데, 1년 반 남짓 기간 동안 얼마나 책을 사게 되었는지 한 번 숫자로 알아보았다.

**도서관이나 어디서 빌린 책들,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 다 보고 나눠준 책들, 본가에 있거나 회사에서 준 책들은 그냥 변수 @로 두고 없는 셈 치고 내 방에 남아있는 책들만 기준으로.



<약 18개월간 구매/읽은 책 현황>

현재 보유 권수 89권 + @ (짐을 풀다 보니 짐 사이에 몇 권 더 있었다. 재능.)

*시 40권 + @ (안 읽은 거 ×)

*전공(컴공) : 18권 + @ (다 보고 버렸거나 사무실에 놔둔 것 등) (안 읽은 거 ×)

*전공 외 비문학 : 13권 + @ (읽는 중 1)

*소설 : 18권 + @ (안 읽은 거 11)

구매 후 독서율(총) : 약 86.5%
구매 후 독서율(비문학+시) : 약 98%
구매 후 독서율(소설) : 약 37%
사놓고 안 읽은 : 약 13.5%
소설 안 읽은 : 약 63%

1년 반 동안 투자금액 : 최소 단가 9,000원(시집 기준) x (89 + @) = 약 80만 원 + @@. 월 약 44,000원 + @. 안 읽을 확률 산정 시 '월 약 5천 원가량 낭비.'

결론) 난 소설은 사봤자 안 읽을 확률이 절반 이상이니까 흥미만으로는 사지 말자. 5천 원이면 뜨끈한 국밥이 한 그릇.


왼쪽이 읽은 책, 오른쪽이 사놓고 보지도 않은 책


700ml 큰 술병 4개 이상 쌓을 만큼 책을 샀더구나.






'책 읽는 습관'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혐오한다.


위에 사진만 본다면 소위 말하는 '독서습관이 잘 든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말은 내게 패륜 이상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어떤 개XX가 '좋은 습관'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냈는지 아주 조상 후손 대대로 묘역을 찾아가 안부를 묻고 싶다.


습관은 스스로 자연스레 굳어진 패턴을 습관이라고 하지 주입된 패턴을 습관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군인이 밤 10시만 되면 졸리고 나팔소리를 들으면 번떡 일어나서 침대를 정리하는 건 부지런하고 단정한 습관이 아닌 훈련이다. 개앞에 먹을걸 두고 기다려, 굴러, 이제 먹어- 하는 건 잘 참는 습관이 아닌 조련이다.


나는 편협한 세상을 가진 지식 중독자다. 시를 좋아하고, 기술, 사회과학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만 관심이 있고, 그런 것들을 위해 쌓여간 책이다. 어디 누가 좋다 해서, 누가 추천해서 맘에도 없는 책을 읽은 적은 단언컨대 손에 꼽는다.(아래 번외 참조)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난 책을 싫어한다. 오히려 유툽의 다큐나 정보성 영상을 엄청나게 본다. 그 광고 보는 몇 초도 아까워서 프리미엄까지 결제했다. 온라인 기사, 인터넷 포럼, 커뮤니티, 위키나 비정형적인 자료들도 온종일 보고 있다. 내 관심사에 수단을 가리지를 않는다. 책은 거기에 일부 포함될 뿐, 내가 얻는 정보의 양으로 따진다면 일상 속에서 정말 일부의 일부조차 되지 않는다. 이런 나를 독서 습관이 잘 들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쌓아놓고 보는 것 같다는 단편만 보고, 사실은 씻지도 않고 드러누워서 유툽이나 보며 히히힉 거리는 삶을 더 사는 나를 선뜻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 목적에 합당하다면. 위 통계에서 보는 것처럼, 좋아하는 것들에 한정해서. 이기적으로. 저기서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은 아주 영영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 난 이 말을 믿는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겠지. 그러니 감히 나의 마음을 습관이라고 모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 읽는 습관이 왜 갖고 싶은데?


그 걸 가지면 막연히 뭐라도 나아질까 봐? 뭐가 나아질 것 같은데? 돈을 더 벌어? 아마 책을 읽는 습관이 돈을 더 벌게 하지는 않을 텐데. 책 읽는 일이 도움이 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 있지. 그런 사람들은 습관이 필요하지 않아. 습관 이전에 일상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런데 굳이 습관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자신에게 그 프레임을 들이려는 사람에게는 사실 책이라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야.


책을 읽어야 사고에 도움이 된다, 책이 진리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너무 생각 없지 않아?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그럼 선생은 왜 있고, 학교는 왜 있으며, 수업은 왜 있고, 영화는 왜 있고, 미술은 왜 있고, 음악은 왜 있는 거니.


게임이나 만화, TV가 사람을 망친다는 오해가 있듯이, 책도 사람을 더 '올바르게' 만든다는 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올바른'이라는 건 무엇일까)


그러니 제발 책을 습관 취급하지 말아 줬으면. 정확히는 수많은 콘텐츠 중에 책을 정답인양 괴로워하고 닮아가고 싶다는 억지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 줬으면. 막연한 불안을 마주한 당신에게 당신이 싫어하는 걸 처방하지 않기를 바래.


난 유툽을 보는 시간이 더 많고, 그 안에서 BJ들이 미친 소리 내면서 게임하는 게 재밌고, 예쁜 아이돌들이 춤추고 웃는 모습에 웃어. 그게 내 시간을 즐겁게 해. 차 마시고 조용한 집에서 혼술 한 잔 하고 그러는 게 행복해. 책 없어도 아무 문제없어. 책 본다고 매년 더 돈을 잘 벌지도 않은 것 같아.


친구도 거의 없는데? 위에 푹푹 찌르는 말투 보면 알 텐데. 책 읽는다고 사람 좋은 건 아니야. 교양 있고 우아하지도 않아. 책을 읽는데도 아주 개차반이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더 만나기 위해 책 읽는 짓은 한 개도 도움이 안 되었어.


'OO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사람이 책을 많이 읽으라 그래서 그 사람처럼 돼 보려고요' 라니. 안된다니까. 그 사람이 책이 전부일 것 같으냐고. 출판사 직원은 왜 십수 년 월급쟁이냐구. 혹시라도 만약 당신이 OO가 된다 해도 그렇게 되면 그 희소성도 가치도 떨어진다니까. 제발 당신의 인생을 살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추천해준 책은 참 더럽게 안 읽히더라. 나도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고 그 사람처럼 조금은 닮고 싶었어. 그런데 희망과 방향은 항상 정방향은 아닌듯해.


그러니 어디서 책이 좋다는 소문을 고는 '책 읽는 습관'을 들여야지 하며, 소중한 자신에게 독을 억지로 먹이지 말라고. 제발 자기 계발서는 버리라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더 나은 사람을 만나고 좀 더 일찍 출근해보고 좀 더 정직히 일해보고 주말에는 좀 더 좋은 풍경을 보러 가라고 제발. 책을 읽는 게 자기 계발하는 게 아니라고..






고집 없는 사람 너무 싫다.


자기 잘난 맛에 혼자 세상 살며 고집부리는 사람보다 귀 얇고 줏대 없는 사람들이 싫다. 그저 법이 두려워 도덕적인 사람보다 비도덕적이어도 자기중심이 있는 사람이 좋다. 그렇다고 법을 어겨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분명 당신만의 우주가 있으니까. 그것을 외면해서 너무 외롭게 하지 않기를. 그냥 노는 게 제일 좋으면, 그게 지금의 당신을 성장시키는 중이라고. 응원한다. 믿는다.




...




(번외) <명예의 전당>

그래도 책을 정리해봤는데, 베스트는 꼽아 봐야지. 내가 주는 뎁씨 어워즈.


2019-2020 뎁씨 어워즈 수상작 //한줄평

(사진엔 없지만 다 읽고 지인에게 떠나간 책 포함)


*시 부문 : 우주적인 안녕 (하재연)

//빛과 함께 사라져서. 우주에서. 못 지내길. 빈다.


*소설 부문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미래에도 사람은 분명 외로울 테니까


*비문학부문 : 울림과 떨림 (김상욱)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니까


*로튼토마토(실망) : 모순 (양귀자)

//거품


*특별상 : 아가미 (구병모)

//물처럼 따듯한 마음과 보석 같은 상상


**대상 :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끝끝내 마주하겠습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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