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나의 삶에 사랑이 넘치기를
파리 빌라 - 윤진서
윤진서.
당신은 올드보이의 수아를 떠올리려나.
나 기억해 줘야 돼, 알았지? *영화 올드보이 中
여러모로 유명한 여배우는 많지만, 표정과 말소리 하나하나 '느낌 있는' 여자 영화배우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윤진서를 꼽고 싶다. 기억도 안 날 드라마 한켠에 비중 없이 출연해도 혼자 무언가 독립영화 같은 표정과 구도를 만들어내는 느낌이 들어버리는 천상 영화배우 윤진서. 영화 올드보이에서 그녀가 짓는 저 슬프게 웃는 모습을 낼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있을까. 저 표정의 의미를 알려면 영화 올드보이를 봐야 하는데, 살면서 한 번쯤은 꼭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사실 연예인이 책을 쓴다는 것에 큰 감흥을 느끼지는 않는다. 말 몇 마디 엮어 편집자들이 9할은 대필한 자기 계발서라며 수필집이라며 힐링북이라며 내놓는 것을 보면 세상 참 경제적이군요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연예인도 격렬한 감정노동자이고, 예술가이고, 작가들 만큼이나 감정이 예민할 텐데, 표현도 잘할 텐데. 배우는 많지만 명배우는 드문 것처럼, 왠지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책을 냈다고 해서 팬심 비슷한 마음으로 읽어보면 실망스러웠던 적이 더 많아서.
5년 전 문학동네에서 이 책이 출간되고 여러 매체들로 책 소개를 했는데, 페이스북 페이지로 책의 문구를 이미지로 포스팅한 게 몇 장 있다. '책에서 한 문장만 구해낼 수 있으면 성공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사는 나에게 그 한 장 한 장이 너무 무겁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는 이 텍스트 박스 한 장으로도 충분해서 당시 내 페이스북에 나만 보기로 포스팅해서 걸어두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면 꼭 보고 싶어서. 2015년 5월 17일. 그때 나는 정말로 파리 외곽의 작은 빌라에서 이걸 보고 있었거든.
2015년의 어느 봄날, 나는 가출을 선언했다. 조금 멀리, 조금 오래. 얘가 왜 이러나 싶은 가족들의 표정을 뒤로하고 오랫동안 집에 오지 않겠다고 티켓을 끊고 떠났던 이유는 휴식도, 자랑도, 자기 계발도,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정말 그저 나를 아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단지 누구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첫인사를 하고, 공적이 아닌 사적으로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누구라도 낯설게 만나보고 싶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거짓말이라는 것도 해보고 싶었고,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 어지러울 만큼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누구의 핀잔도 없이 원래 나는 그랬던 사람인 것처럼 딱 한 번만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와인과 브랜디, 위스키가 조금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고 싶다. 운동화를 신어도 구두를 신은 것 같은 사람이고 싶다. 피우지 않는 담배라도 한동안은 벤치에 앉아 행복하게 하늘에 연기를 내쉬어 보고 싶다. 낭만적이지는 못해도 누구보다 자유롭고 싶다. 놀랍게 똑똑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능청맞고 우스운 사람보다는 조금 날카롭고 진중한 사람이고 싶다. 그럼에도 정겨운 사람이고 싶다. 그렇게 정말 새로운 사람이 되면 그동안만큼은 이전의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얼굴도 모르는 남일처럼 조금은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유로도 하지 않는 부르고뉴 피노누아 와인을 요상한 그림이 그려진 싸구려 머그컵에 가득 따라 옆에 놓고, 생각보다 추운 5월, 때탄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등에 걸치고 파리의 아주 작은 빌라의 정원 흰 벤치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그래도 한낮에는 따듯한 햇빛이라서 다행이야 고마운 하늘을 보면서. 헤메이러 갔지만 결국 더 많이 헤메이던 그 시간에서 정확히 5년이 되어가는 이제서야 이 책을 읽어보게 된다. '진짜 개고생 했어. 이제 나 다시는 오랫동안 혼자서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야겠어'라고 서울로 돌아와 짐을 풀어버림과 동시에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얼마 전 파리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 있어서.
붉은 코듀로이 셔츠처럼 부드럽지만 단단하고 열정적인 표지, 그 뒷면에 작고 검은 글씨로 적힌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온다는 인생의 축제 같은 시간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파리빌라. 그곳에서 누구에게 어떤 인생의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을지. 삶은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가장 준비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떠난다. 책을 연다. 종이 위를 걷는다. 그녀가 '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이 시작된다.
'그가 떠난 후 이곳에서 나는 이름을 잃어버렸다.' 첫 문장을 시작으로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인도, 다시 프랑스, 그리스 아테네,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서울, 동해까지 이어지는 이별 후 시작된 여행.
가장 최근의 이별. 열차에서 격한 말다툼을 하다가 화가 나서 식당칸으로 도망친 남편이 사과를 하나 가져다주는 이야기. 파리에 살고 있는 그녀의 친구 '폴린'을 찾아가 얹혀 지내는 이야기.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필 그리스 총파업 날 여행을 갔던 이야기. 한국에서 서핑을 하다 만난 사람과 행복했었던 이야기. 행복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던 이야기. 신비롭게도 종교로만 살아가는 듯한 인도에서 외롭게 여행하던 중 연락 온 옛 연인을 다시 만나러 당장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날아갔던 이야기. 공항에서 그를 마주치자마자 확신이 들어 돌아섰던 이야기.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으면서 울지 않는 이야기. 이것을 소설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별부터 시작된 여행의 시간 속에서 마주쳤던 외로움과 또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고,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온다는 인생의 축제' 뒤로 떠나고 있는 시간이 있고, 또 그렇게 각자 다시 떠나고 있는 모습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겠지만. 언젠가는 '외면했다'는 말이 가장 적당하게 돌아서겠지만.
모두 멈춰놓고 혼자 울고 싶은 동안에도 세상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잘 흐르고 있을 거고, 그것이 또 엄청 미울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게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구해줘'라는 말이 가장 필요할 거라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곁에 있어야 느껴지는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홀로 몇 번을 되감아도 재현할 수도,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다면 진작 세상에 슬픈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 그러니 홀로 증명하려는 조그마한 노력조차도 하지 않기를.
'있잖아, 만약에 네가 누군가에게 실연을 주었다면, 아마도 그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을 거야. 네가 당했던 실연만이 진짜 사랑이었을 거야. 이유를 불문하고 끝까지 곁을 지키지 못한 쪽은 사랑했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거야.'
실연은 어디에나 있겠지, 다만 짧은 삶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의 간격은 어쩜 이리도 촘촘할 수가 있는 것인지.
그녀의 친구 폴린은 결국 그녀대로 결혼이라는 운명적인 길로 청첩장을 두고 먼저 떠나게 되고 그렇게 여행은 끝난다. 청첩장에는 '우리의 인생에 비밀이 넘치길'.이라고 쓰여있었다.
소설이 끝나고 그녀도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다. 돌아오는 시간 동안 읊어지는 독백 같은 말로 소설은 끝이 난다.
-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의 일기장을 읽었다. 그중 한 페이지에는 '사랑이란, 인생의 독'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장을 들여다보며 만약 정말 그렇다면 독을 먹고 죽어가는 것이 인생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나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바랄 뿐이다. 부디 나의 삶에 사랑이 넘치기를.
독백으로 가장 솔직에 가까운 마음과 생각들을 말할 때 느껴지는 감명과 공감이 있다. 나는 그런 방식을 좋아한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혼자 어른에 대한 의문으로 중얼거리는 대사들이나 독백, 양귀자의 '모순'이라는 책의 챕터마다 시작되는 짧은 인용, 그것들처럼 파리빌라에는 그녀가 사색하고 느끼고 있던 생각들을 곳곳에 멋지게 꺼내어 놓는다.
한 번이라도 혼자서 사랑의 끝을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그것 때문에 한 번이라도 떳떳하게 마음이 아팠던 적 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쥐어주고 싶다. 그걸 위해 내가 온통 긋고 싶었던 밑줄은 너의 몫으로 남겨둔다.
잠깐 울었으면 좋겠다. 울고 나면 민망하리만큼 웃음이 올라온다. 그것은 울고 나면 해결될 일로 뭐 그리도 슬퍼했었냐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 같다. 울고 나서야 비로소 환하게 웃을 수 있다. 울지 않으면 웃고 있어도 자꾸 울 것만 같은 눈이 남아 있을 테고 그것은 숨겨지지 않을 테니까. 마주 앉은 사람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다.
- 아무도 너를 모르는 파리빌라는 어때? 많이 울었어? 나는 몇 가지만 뺀다면 그때의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 같아. 다만 여전히 마음 있는 사람에게 상냥하지 못하고 그래서 오해가 여전히 있는 것 같아. 예전의 슬픈 일들은 여전히 슬프고, 거절은 여전히 두렵고, 몇 날 며칠을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여전히 연락도 잘 못해. 그럼 또 시간이 흐르고 오해도 깊어질 텐데. 파리 참 부질없다 그치. - 과거의 나에게 -
나는 말을 어떻게 종결하고 있었을까. 내가 하는 언어들을 돌이켜 세어보면 '했었다', '한다', '싶었다', '싶다'로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습관이 말에까지 배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보니 이제는 조금 무거운 말을 가볍게 풀어주고 싶다. 좋아'해', 보고 '싶어'.
'이제 나도 달려야겠다.'
당신의 삶에도 사랑이 넘치기를.
파리빌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