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낙서로 가득 찬 나 찾기 노트

단 한 장도 찢거나 더 이상 지우지 않기로 했다.

by 데비안

시간이 많아지고 나는 스스로에 대해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자니,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생각이 생각을 재 생산하는 복리의 법칙에 직면했다. 그래서 나는 노트 한 권을 만들었다.



이름은 '나 찾기 노트'. 표현 그대로 나를 찾는 노트이다. 예쁜 다이어리도 있지만 예쁜 다이어리를 보면 예쁘게 채워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욕심을 부린다. 그러다가 1년 내 채우지 못하고 구석 어딘가 처박아 두기 십상이라 그냥 하얗고 적당히 두꺼운 스프링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나는 어렸을 때, (벌써 내 인생의 절반을 돌아가야 하는 시절이 되었다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싸이월드에 백문백답 적는 걸 아주 좋아했다. 뭔가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꿈꾸는 것 등 그런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다 보면 좋아하는 걸 하고 사는 미래라던가, 대학생활 때 무엇을 꼭 할 거라던가. 그런 설렘과 기대가 참 좋았었다.


나의 새로운 친구가 된 직관적이고 투박한 '나 찾기 노트'는 30대 버전의 싸이월드 백문백답 노트라고 하면 되겠다. 하얀 노트를 펼치자 뭘 써야 할까 갑자기 막연해진다. 나를 채울 수 있을까. 뭘 채워야 잘 채울까. '잘'하고 싶다는 이 무한 욕심이 내 손을 묶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아무거나 쓰기로 했다.


'1번,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


나를 설명하는 키워드를 이것저것 중구난방으로 쓰다 보니 도대체 이게 뭐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의 첫 장이 엉망진창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첫 장을 찢었다. 그런데 문뜩 나는 노트를 예쁘게 잘 완성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나의 복잡하고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을 그저 털어내고 정리하고 싶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첫 장은 이미 찢었지만 이제 이 노트는 오타를 쓰더라도, 글자가 엉망이어도, 내가 대답하려는 논점과 달라지더라도 결코 찢거나 지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노트를 끝까지 쓰지 못하고 버릴 때가 많았는데, 끝까지 채웠을 때는 처음 샀던 노트 페이지 수의 절반 밖에 남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쓰고 지우고 찢고 버리고. 나에게는 예쁜 노트 한 권을 완성하겠다는 틀린 목표가 있었다.


'여태 나의 발목을 잡은 건, 잘하고 싶은 욕심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었을까. '


그냥 내 맘대로 엉망진창인 노트여도 괜찮은데 말이다. 예쁜 것 멋진 것 잘 만든 것 같은 그런 수식어는 이제 좀 내려놓자.


요즘은 나찾기 노트가 생기고 나서 생각이 복잡해질 때마다 노트를 펼친다. 나는 확실히 아날로그가 좋은지 이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면 괜스레 신이 난다.


"어디 보자~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니~?"


혼잣말이 늘었다. 그렇게 끄적끄적 낙서하듯 쓰다 보면 형태 없는 불안이라던가, 괜한 두려움이라던가 이런 게 조금은 나아진다. 아, 가만 보니 이름은 나 찾기 노트이긴 한데 혼자 떠드는 잡담 노트이기도 한 것 같다. 뭐 아무렴 어때. 즐거우면 그만이지!


나는 오늘도 내일도 나를 찾아 이 노트를 나답게 하나씩 채워보려고 한다. 나는 나에 대한 질문과 낙서로 가득한 엉망진창의 나 찾기 스프링 노트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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