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첫 유럽여행의 기억
장기 해외여행은 안 된다
며 유럽여행을 반대하는 부모님을 오랜 시간 설득하여 겨우 길에 나섰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지만 금전적으로나 상황이나 여의치 않아 그간 국내여행을 많이 했었다. 그만으로도 나의 일상은 행복했으나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꼭 유럽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 꿈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서점에 가서
두툼한 서유럽 배낭여행 책을 한 권 구매했다. 책을 보며 어느 나라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떤 도시들이 있는지 정독하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인터넷을 검색하며 나의 루트를 채워갔다. 일정상 가지 못할 듯한 국가와 도시는 분철하여 책장 한편에 두었다. 여행사에 항공텔(항공과 숙소가 묶여있는 상품. 지금이야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모든 걸 검색하고 예약하는 나지만, 이 때는 여행자 레벨이 높지 않았다) 상품을 예약하고 나서야 정말로 실감이 됐다. 비행기를 타기 2주 전이었다
1달을 책임 질 25인치 캐리어
짐을 싸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국내여행을 할 때는 늘 작은 배낭 하나에 속옷과 세면도구와 옷가지 하나를 챙기면 충분했는데 이번에는 여행기간도 길뿐더러 여름부터 초겨울 날씨까지 책임져야 하니 캐리어의 역할이 막중하다
12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 중에 정보를 검색하면서 여행하거나 지도 어플을 보면서 다닌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더 꼼꼼하게 챙길 수밖에
나의 첫 유럽여행 일정
은 영국에서 시작하는, 가장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일정이었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어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그리고 옥토버페스트 기간과 겹치게 독일도 간다. 당시에는 지금만큼 핫하지 않았던 스페인도 일정에 넣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전에 유럽여행을 하다가 스페인에서 강도를 만난 친오빠는 내 일정을 보고는 “스페인은 빼라”며 성화였지만 나는 가우디의 작품을 꼭 보고 싶었다. 당시 대학교에서 건축 수업을 듣고는 건축물들의 구조와 스토리에 푹 빠져있던 때라, 오빠의 충고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내 첫 유럽, 영국
(비록 지금은 브렉시트의 여파로 ‘유럽’이라고 말하기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으나) 내 유럽여행의 첫인상은 영국 런던이다. 첫날은 밤에 도착해 숙소에 체크인하고 쉬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둘째 날부터 내 눈은 휘둥그레 해졌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건물, 사람, 소리 모든 것이 말이다. 지금의 내 시각에서 보자면 런던은 서울처럼 분주한 큰 도시인데 말이다. 그때는 그저 모든 게 새로웠고 예뻐 보였다. 가끔은 이때의 내가 그립기도 하다
영국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박물관이 무료입장이었던 것이고, 제일 별로였던 것은 밥이 맛있지도 않고 비싸다는 것이었다. 당시 파운드 환율은 거의 2000원으로 지금보다 훨씬 높았고 나는 학생이었으니 당연하다. 그 와중에 ‘피시 앤 칩스’는 한 번 먹어봤고 남은 두 끼는 KFC를 가기로 했다
로맨틱한가? 프랑스
바다 건너 지하철을 통과해 만난 로맨스의 도시 프랑스 파리. 하지만 내 첫 시야에 들어온 것은 흐린 하늘과 쌀쌀하게 불어오던 바람, 그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들과 아시안 여행객을 쳐다보는 커다란 세 명의 흑인이었다. 그 스산한 분위기에 나는 ‘이 도시는 썩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여행 이후 다시 간, 첫 번째로 재방문한 곳이 프랑스 파리라는 점은 꽤 특이하긴 하다. 물론 그 두 번째 파리 여행에서 숭한 꼴을 당하고서는 “아 진짜 파리 너무 싫어! 다시는 안 와!”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이후 또 한 번 파리에 가게 된다. 참 묘한 인연이다
그 자체가 유적,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은 도시를 다녔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적 같은 로마를 중심으로 해 남부 당일치기 투어를 예약했고, 피렌체도 당일치기로 기차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다
유레일 패스가 있으니 잘 활용해서 기차를 타고 싶었다. 독일-스페인 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차를 타고 국가와 도시를 이동했다.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흘끗 볼 때면 이탈리아에서는 유독 기차에 여행자들이 많이 보였다. 역시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엄청난 매력이,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아름다운 지중해와 평원이 있고 도시에는 곳곳에 오래된 것들이 아름답게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음식도 엄청 맛있다! 가격도 많이 부담스럽지 않고 말이다 (베네치아는 제외하고 생각하자) 나는 이 곳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 스위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스위스는 스위스다. 이전에 방문한 국가들도 아름다웠지만 스위스는 그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다들 너무 일찍 가게를 닫고, 밤에는 할게 별로 없는 것만 빼면 더없이 완벽한 곳이 스위스다
여기서는 엥겔베르그라는 산 중턱에 있는 관광마을에서 숙박을 했다. 숙소에서 5분만 걸어 나가도 아름다운 산과 시냇물을 볼 수 있었다. 밤에는 쏟아질 것 같이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볼 수 있었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여행 다닐 때 워낙 날씨 운이 좋은 편인데, 덕분에 여기까지 우산을 한 번도 펼치지 않았었다. 이다음 일정인 독일에서는 하루 무섭게 비가 내려서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었지만 이탈리아와 스위스, 스페인에서 날씨가 완벽했던 것으로 충분하다
옥토버페스트가 한창, 독일
사실 옥토버페스트를 생각하고 일정을 짠 게 아니었는데 일정을 짜면서 독일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를 알게 되고 일정에 냉큼 넣었다
다른 곳들도 둘러보고 심지어 근교도 다녀왔거늘 독일에 대해서는 옥토버페스트에서의 기억이 뇌를 온통 지배하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컵(1L)로으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그 엄청난 컵을 한 손에 네댓 개 들고 분주히 나르는 사람들, 대화를 하기 위해는 거의 클럽처럼 소리를 쳐야 했던 시끌시끌함, 신난 사람들의 떼창과 테이블 위 춤, 모든 게 생생하다
마지막 여정, 스페인
그리고 마지막 여정인 스페인에 도착했다. 독일의 잔뜩 먹구름 낀 날씨와 정반대인 쨍쨍한 날씨가 반겨줬다. 독일에서는 긴팔에 재킷을 입고도 쌀쌀했는데 여기는 재킷을 벗어도 더웠다. 아니 내가 무슨 대여섯 시간 비행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날씨가 다르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옆, 가우디 길에 숙소가 있었다. 매일 일정을 시작하고 끝나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볼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할 때면 늘 맥주를 들고 벤치에 앉아 성당을 감상했다. 마지막 여정으로 스페인을 넣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에서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들렀고 그의 근교 도시들도 방문했는데 이 여행에서의 스페인은 온통 바르셀로나로 기억이 가득 차 있다
첫인상부터 무척 마음에 들었던 바르셀로나는 구엘공원에 올라 도시와 지중해를 내려보았던 이 순간 정점을 찍었다. 나는 이 순간 스페인이 완전히 반해버렸으니깐.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꾼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내가 스페인에 살게 될지, 스페인 어느 집의 치때에 누워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아 언젠가 스페인에 또 여행을 올 수 있을까” 이 정도가 현실적인, 대학생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스마트폰의 부재로 조금은 불편한 여행이었지만, 핸드폰과 대화하는 대신 사람들과 더 많이 대화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손짓 발짓을 하며 겨우 대화를 이어나가고 깔깔거렸다. 수십 번 길을 잃었지만 그렇게 잃은 길은 더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줬다. 어쩌다 들어간 식당은 실패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어쩌다가 맛집을 찾아냈을 때는 더없이 뿌듯했다. 한인민박에서 공유하는 서로의 여행 이야기와 정보는 더없이 유용한 꿀팁이었고, 먼저 여행을 마친 사람은 자신의 가이드북-가이드북에 자기 자신의 여행 팁도 여기저기 적어둔-을 아직 일정이 남은 여행자에게 주고는 했다. 여행자는 기쁜 마음으로 맥주 한 캔을 샀다
그때가 그리워서인지, 그저 스마트폰을 계속 쳐다보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인지, 나는 여행할 때 가끔 핸드폰을 비행모드로 돌려두고 돌아다니곤 한다. 이제 그 시절로 우리가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