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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릭 Feb 26. 2024

02. 첫 번째 이혼

그에겐 첫사랑이 있었다.


범인(凡人)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파격적인 타입이었던 여자는 선비 그 자체였던 시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로 인해 첫사랑과의 헤어짐을 겪은 그는 23살 어린 나이에 발그레한 볼로 자신을 좋다 고백하는 나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린 연애를 시작했고 사랑(?). 결혼 프러포즈를 하며 그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단호히 말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랑 결혼 후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나를 불행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믿으라고.

나는 그런 그를 절대적으로 믿었다.  


...........


그가 다른 이를 만나고 있고 그 상대가 첫사랑 그녀라는 것을 나는 그저 스치듯 떠오른 촉으로 알아챘다.

그 어떤 단서도, 그 어떤 증거도 확인한 게 없었는데 어느  뇌리를 강하게 스치며 그녀가 떠올랐고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는 세월을 나는 꽤 견뎠다. 그러던 중 설에 처가 방문을 다녀오자마자 그는 사우나에 갔다가 자고 오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집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  나는 절망스런 마음을 한 채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저 밤새 손뜨개를 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들어올 기미가 없었다.


시린 새벽,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내가 너의 일탈을 다 알고 있노라 문자를 했다.

잠시 후 그는 조금만 참아주지 그랬냐는 작은 원망을 담은 답장을 했다.

그의 답장이 내 등에 칼을 꽂아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뚫린 등으로 들이치는 칼바람에 심장이 너덜해졌.


..........


나는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미워하고, 붙잡고, 배신당하기를 거듭했다. 그는 용서를 구하고, 화를 내고, 배짱을 부리고, 미안해하다가 다시 배신하기를 반복했다.


결국 나는 그를 놓고 나를 살리기를 택했다.


..........


사실 나는 진즉에 그를 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놓기 힘든 이유가 너무 커서 쉽게 이별을 택하지 못했다.

 

나와 그 사이엔 두 명의 아들이 있다.


그가 첫 번째 이혼사유에 몰두해 있을 무렵 아이들은 고작 초등학생이었다.

작고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 앞에 덤덤한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나는 좀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더랬다. 못난 어미였다.

그런 어미가 위태로워 보였는지 작은 아들은 불면에 뒤척이다 겨우 잠든 어미를 위해 새벽이면 조용히 찾아와 이불을 곱게 덮어주고 소리 없이 돌아갔다.

그런 아이의 기척을 느끼며 나는 목젖을 꿀렁이며 울음을 참았다.

그렇게 착한 아이는 가끔 찾아오는 아빠의 차 안에서 순진무구한 눈망울로 남편에게 물었다.


"아빠, 아빠 사는 거기에 아빠 아이들도 있어?"


남편은 당황했고 나는 비참했다.

저 어린아이가 배다른 형제가 혹시 있나 묻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준 게 너무 미안해서 죽고 싶었다. 해서 나는 이혼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또 어느 날,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 아이들을 보려고 아이들 방에 갔다.

그런데 큰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

아이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내가 물었다.

 

"엄마가 아빠랑 이혼해도 괜찮아?"


큰 아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눈은 꼭 감은 채로 아이는 말했다.


"엄마, 나는 아빠가 좋아. 하지만 엄마가 힘들면 이혼해도 돼. 엄마가 힘든 거 싫어. 나는 괜찮아."


아이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하얀 손이 이불을 꼭 움켜쥐느라 더 하얗게 질린 걸 보며 저 아이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버겁겠구나 싶어 미안하고 미안했다. 하여 나는 가정이란 울타리를 내 맘대로 깨부술 수 없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참아내고 있던 나의 무릎을 꿇게 만든 건 그의 한 마디였다.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자신을 떠난 첫사랑에게 복수하려고 나를 택했노라고.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그의 말은 내 인생의 전부라 여겼던 가정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 그날보다 더 큰 회오리를 일으키며 내 마음을 박살 냈고 나는 미뤄두었던 결심을 꺼냈다.


..........


첫 번째 이혼을 확정하고 법원을 나오며 그는 몹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좀 신나 보인다?"


신날 일도 없고 신날 일도 아니라고 말하고 나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그토록 원하는 이혼을 해줬는데 그는 왜 신나지 않아 할까.


3호선 좌석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그의 의중을.

이런저런 생각 끝에 다다른 결론은 결국 그에게 나는 쉬운 호구였구나였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멍청이.

자기한테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할 순딩이.

어제든 자기가 돌아가면 받아 줄 바보.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오히려 마음이 후련해졌다.


당신은 나를 그렇게 생각했구나. 나는 아닌데.

나는 이제부터 너 없이 아이들과 재미나게 살 테니 두고 봐.


결국 그에 대한 미련을 떨구게 도와준 건 그였다. 하여 어느 순간은 감사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렇게  내 첫 결혼은 이혼이란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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