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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릭 Feb 28. 2024

03.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가 떠난 집에서 시아버지와 나와 아이들은 함께 살았다.


시아버지의 좌청룡, 우백호인 두 아들.

시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나.

시아버지는 아이들에겐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셨고, 가장을 잃은 나에겐 기둥이 되어주셨다.


하지만 혼자된 며느리와 아빠 없이 자라는 손자들을 보는 게 힘드셨는지 어느 날,


"이제 OO동 집에 가서 살아라."


아버님은 예전에 살던 서울 집을 내 명의로 돌려주시며 분가를 명하셨다.


"아버지, 저희 그냥 여기 있고 싶은데요."


"아니야! 이제 나가서 너희들끼리 살아!"

"그래도 아버지..."

"내 말 들어!"


화를 모르시던 시아버지의 큰 소리에 나는 움찔 말을 멈췄다.

칠순이 넘은 노부를 홀로 두고 분가를 하는 게 엄청난 잘못같아서 무서웠고, 갑자기 쫓겨나는 것 같아 두려웠으며, 젖을 뗀 순간부터 당신의 좌우에 품고 키우셨던 아이들을 당신 손으로 떠나보내게 만든, 이 몹쓸 상황을 만든 죄인이 나인 것만 같아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단호했다.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듭해서 분가를 명령하셨다.


이사하는 날, 나는 이삿짐 트럭을 먼저 출발시키고 차에 오르기 시아버지를 돌아봤다.

아직 어린 아들들은 차 안에 앉아 할아버지를 향해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시아버지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나를 향해 어서 가라며 재촉하는 손짓을 했다.


"아버지, 갈게요."


우물쭈물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가속페달을 밟다 백미러를 보았다.

저만치 뒤에 떠나는 차를 바라보며 서글프게 서 있는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10분 전보다 10년은 늙어버린 듯한 시아버지가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갈길을 재촉했다.

나는 운전을 하며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울었다.


꺾어지는 길목을 지나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쯤, 아버지도 우셨을까?


..........


서울로 분가를 하고 난 후, 시아버지는 종종 집을 찾아오셨다.

사랑하는 손주 둘을 좌우 옆구리에 가득 안고 그리웠던 온기를 느끼며 아이들 방에서 잠을 청하셨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일하는 며느리 피곤할까 봐 두 아이들을 데리고 이르게 문을 여는 식당에 가서 아침밥을 먹여 들여보내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다.

함께 살던 시절에도 시아버지는 집안일과 회사일, 육아까지 하느라 피곤한 며느리를 위해 늘 먼저 일어나 전기밥솥에 밥을 지어주시곤 했다. 시아버지의 조용한 배려가 나에게는 늘 큰 힘이 되었다.


어느 날 집에 신 시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신 분이라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치아를 가지고 계셨고 늘 일정한 몸을 유지하셨는데 그날의 아버지는 엄청나게 부어오른 얼굴 때문에 눈꺼풀이 덮일 지경의 상태였다.


"아버지 얼굴이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좀 부어서 그래."

"아니 이렇게 부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울대병원 가서 검사도 하고 다 했어. 괜찮대."

"얼굴이 이렇게 붓는데 괜찮대요?"

"괜찮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작은 아이의 몸을 만지작 거리며 대화를 얼버무리려는 시아버지의 모습에 왠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저렇게 까지 부인을 하시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시 검사해 보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얼굴이."


시아버지는 대충 대답해며 얼렁뚱땅 상황을 넘어갔다.


..........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은 무렵부터 가끔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만났다.

시아버님이 부은 얼굴로 집에 들르신 지 한 달 정도 지났던가?

그 무렵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만나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밥을 먹던 그가 심각히 건넨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아버님이 암이라 했다.

그 부은 얼굴이, 말투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결국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실감이 안 나서 너무 멍했다.


시아버지의 병세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내시경 검사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이유 모를 이유로 음식물을 삼키기 힘들어하셨다.

툭툭 예측할 수 없이 발현되는 고통들에 괴로워하셨다.

대학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게 없다며 퇴원을 당하셨고, 제대로 케어해주지 못하는 요양병원에서 힘겨워하시다가 임종을 앞둔 말기 환자들의 통증관리에 특화된 분당의 호스피스 전문 병원에 입원하셨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좋았다. 무엇보다 말기 환자들의 통증을 완화시켜 남은 삶을 고통스럽지 않고 편하게 케어해 주어 좋았다.


아버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고통스러워 보이진 않았지만 약물에 취해 힘없이 누워계시는 시아버지는 그새 참 많이 수척해졌다.

말을 건네기에 먹먹해진 목구멍은 협조적이지 못했다.

그저 곁에 앉아 시아버지의 손과 팔을 주무르며 조금이라도 시원했으면 좋겠다 기도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계시던 시아버지가 쉰 목소리로 작게 말씀하셨다.


"왜 자꾸 살려놓고 그러냐... 나는 갈 준비가 됐는데..."

"아버지, 가긴 어딜 가요! 애들 크는 거 다 보셔야지."


그 며칠 후, 갈 준비가 되었다 말씀하신 시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는 한 명씩 시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잘못을 빌고, 감사를 전하고, 잘 살겠노라 안심을 시켜드렸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는지 묘하게 가빠진 시아버지의 호흡에 자식들이 침상 곁으로 모이자 아버님은 힘겹게 눈을 뜨셨다.

남편과 시누이들의 울음이 크게 터졌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어지럽게 엉켰다.


"아빠, 여기 OO이도 있네!"


시누이들과 남편 뒤에서 울고 있던 나를 작은 시누가 시아버지 앞으로 끌었다.

시아버지의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눈동자로 마지막 인사와 당부를 건네셨다. 나는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은 아버지는 스르륵 눈을 감고 세상과 이별했다.


이혼한 며느리지만 나는 상주로 빈소를 지켰다.

오랜 세월 며느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시아버지에 대한 의리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 만에 조부상을 당한 작은 아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교복을 반듯하게 차려입고는 손님을 맞이하고, 신발을 정리하고, 손님 상을 정리하면서 할아버지의 손주답게 의젓한 모습으로 상주로서의 역할을 했다.

빈소를 지키며 오랜만에 시댁 어른들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못난 조카며느리를 반가워해주셨다.

그런 어른들의 손을 마주 잡고 나도 울컥했다.


..........


시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임종실에서 나는 시아버지께 용서를 빌며 잘 살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후, 그와 나는 재결합을 했다.

벌초를 위해 지방의 선산에 있는 시아버지 무덤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나는 애들 아빠와 어렵게 재결합했으니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다짐했던 그 약속을 이젠 제대로 지키며 살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또 그와 헤어졌고 시아버지와의 약속을 영원히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작년 꿈에 나타난 시아버지는 안방 침대 위에 앉아 편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아버지 손을 꼭 잡고 너무 좋다고 울먹거렸다.


"아버지, 자주 오세요. 너무 좋잖아요!"


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나는  다시 며느리 자격이 박탈되었다.

하여,

더 이상 내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시지 않을 거 같아 서글프다.


아버지! 못난 며느리였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울컥 하는, 당신을 향한 존경은 진심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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