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함께였다.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이면 항상 친구와 함께 커피 자판기로 뛰어가 밀크커피와 우유 한 잔씩을 뽑았다. (신설학교라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커피자판기가 있었다. 졸지 말고 공부하라는 뜻이었을까?) 음료가 뜨거우니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데 굳이 우리는 두 잔 섞기를 시도했다. 원래도 밀크커피인데 왜 우유를 섞었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마신 커피는 잊을 수 없을 만큼 꽤 맛있었다. 우리의 섞기 기술은 날이 갈수록 능숙해졌다. 나는 하루 중 그 시간을 가장 기다렸고, 야간 자율학습 시작 10분 전이면 어김없이 친구와 커피 자판기 앞으로 달려갔다.
그때 그 맛이 궁금해 성인이 되어 혼자 자판기에서 밀크커피와 우유를 뽑아 섞어 마셔보았다. 어땠을까? 맛있었을까? 그때 그 맛은 전혀 나지 않았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친구에게 그때 커피 이야기를 하니 친구도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했다. 맞지? 나만 맛있었던 거 아니지? 친구의 끄덕임에 왠지 안도감을 느꼈다.
하루도 커피를 안 마시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는 것처럼 나는 하루에 1~2잔씩은 꼭 커피를 마셨다. 그런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임신이었다. 요즘에야 임신 중이라도 하루 한 잔의 커피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때만 해도 어디 임산부가 커피를 마시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나는 커피를 끊어야 했다.
술도 아니고, 담배도 아니고, 커피 끊는 것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커피는 커피 그 이상이었다. 하루 중 커피 마시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는데 그 시간을 이제 가지지 말라니. 1년 정도 끊으면 될까?라는 말에 모유수유는 안 할 거니?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그럼 2년을 커피와 이별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 알았다. 금연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커피로 향하는 내 손을 막는다는 건 극한의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다시는 커피를 못 마시는 지옥은 없길 바랐다. 하지만 곧 둘째를 가지게 되었다. 얼마 만에 마셔보는 커피였는데 또 마시지 말라고? 산부인과 상담을 하며 나는 커피를 끊으며 지옥을 미리 경험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의사 선생님은 웃으며 하루 한 잔은 마셔도 된다고 하셨다. 그 한마디의 말이 나에게는 신의 구원처럼 느껴졌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가 아니라 "너의 커피를 허락하노라!"라고 말이다.
최근에는 믹스커피보다 아메리카노를 더 자주 마시지만 믹스커피가 날 부를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라고나 할까? 믹스커피 이야기를 했으니 믹스커피 한 잔은 마셔줘야 하지 않을까?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예쁜 잔에 믹스커피 한 봉을 쫙 뜯어 넣는다. 뜨겁게 끓인 물을 다섯까지 세며 붓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딱 정확히 다섯이면 믹스커피 한 봉의 물 양이다. 찻숟가락으로 휘리릭 젓고 한 모금 마시면 아! 바로 이 맛이다.
누가 개발했는지 천재다. 믹스커피는 인류에 큰 공헌을 했음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