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일제 총칼에도 말을 지킨 이유, 모국어는 공동체 기억이니까

by 조 뫼르소

얼마 전 강원도 춘천 '책과 인쇄 박물관'을 찾았을 때, 나는 오래된 활자들 앞에서 한참을 멈춰있었다. 조각 진 나무에 정성으로 새겨진 활자, 손으로 눌러 한 장씩 찍어낸 판본 그리고 우리의 '직지'와 근대 인쇄물까지. 그 연속선에 지금 우리말이 '글'로 놓여있었다. 활자 하나하나가 기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직접 보며, 문자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는 도구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 앞에 서서 괜히 우리 글자가 자랑스러워지는 충만함을 느낀다.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우리 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까막눈 건달 '판수'는 아들의 학비를 내기 위해 소매치기를 계획한다. 적당한 건수를 발견한 판수는 그의 졸개들과 한바탕 소동을 벌여 소매치기에 성공한다. 어렵게 얻은 가방엔 값나가는 물건 대신 종잇조각들만 잔뜩 들었다. 가방을 잃은 '정환'은 일제의 탄압 아래 수십 년에 걸쳐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노력하는 조선어학회 대표다.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신 후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 모여 어느 책방 지하실에서 자료를 모아왔다. 적으로 만난 판수와 정환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단합한다. 조선어 대사전 완성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사전 편찬의 마지막 열쇠를 쥐게 된 사람은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이 아닌 판수다.


영화 〈말모이〉는 총칼로 맞서는 저항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다만, '말'을 지키려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저항임을, 그 탄압이 잔혹한 폭력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춘천의 박물관에서 마주했던 심상과 영화 속 인물들이 한 글자, 한 어휘를 건져 올리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 그것을 후세에 전한다는 것은 그 시절, 보이지 않는 미래를 그리며 너무나 어두운 현재의 권력과 맞서는 일이었다.


언어는 정체성의 핵심이며, 사소해 보이는 기록 행위들이 모여 국가와 문화의 기반을 이룬다. 대한민국 문화의 파급력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 세계적 흥행을 거둔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시리즈 〈파친코〉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선정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원작자인 소설가 이민진의 인터뷰는 큰 울림과 민족 자부심을 안겼다. 그는 작품 곳곳에 한국어를 배치하고 주석을 달지 않는 대신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뜻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을 썼다.


각각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세계의 독자들이 이 설명 없는 한글 단어를 읽으면서 '원어를 접할 여지'를 열어두고 독자 스스로 '학습적 참여'를 요구한다. 작가는 과거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작품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간의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알아야 했고, 그래야 더 풍부하게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을 예로 들며 '글로벌 사회의 지식인'이라면 어느 정도의 한국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아직 한 세기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역사적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광복의 달을 맞아 서로 다름을 확인하는 대신, 함께 쌓아온 기억을 존중하고 화합의 마음을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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