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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Jan 29. 2021

여름 바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월드컵 경기장에 취재 나간 기자처럼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바람 장난 아니야! 날려갈 뻔했어!"

차 뒷자리에서 앞자리로 옮겨 타는데 문을 붙잡고 겨우 옮겨 탔다는 믿지 못할 말이었다.


집에 있던 나는 바람의 위력을 전혀 체감 못하고 있었다. 마침 볼일이 생겨 든든하게 옷을 끼어 입고 집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정신이 혼미했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에 걸어도 앞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절대 그럴 몸무게가 아닌데...  그야말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이었다.


<바람 부는 들판> oil on canvas.  91*91.   by duduni


바람 부는 날이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바람 부는 들판>이라고 이름 붙인 이 그림이다. 그림의 배경은 늦봄의 어느 들판이다. 부모님과 함께 한적한 길을 걷다가 눈에 들어온 풍경이다.

나는 주로 크게 눈에 띠지 않는, 쉽게 지나칠 만한,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이름 모를 들풀들이 단숨에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과 길을 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별것도 아닌 풍경에 감탄사를 내지르곤 한다.

"어멋! 너무 예쁘다!"

그러면 친구들이 내 눈을 좇아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여기서 도대체 어떤 부분이 예쁘다는 건데?"

그럼 난 어이없는 얼굴이 된다.

"아니, 어떻게! 이걸 보고! 이 여리여리한 햇살에 바람 한들거리는 풀 그림자가 안 보인다고?"

친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부모님은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내가 홀린 듯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야, 예술가의 눈은 다르구나. 이런 들풀이 그림 재료로 쓰이겠구나."

이러셨다.

ㅎㅎㅎ


그날의 따스하고 마음 간질이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날 기분처럼 행복했다.

바람 따라 춤을 추듯 붓을 휘둘렀다. 화폭 속에 스스스 바람 소리를 채워 넣고 바람에 휘어지는 풀잎들을 구현해내는 것이 더없이 즐거웠다. 캔버스에 바람을 일으키는 마법을 부리는 기분이었다.   


그림 그릴 땐  음악을 듣는다. 이 그림에 깔린 배경음악은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였다. 가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아련하고 쓸쓸하지만 허허벌판에 부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느낌만 흘러 들어왔다.

이 그림을 볼 때면 '바람이 분다'의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재생된다.


겨울바람 속에서 떠올린 여름 바람이 부는 들판이다.


https://youtu.be/mRWxGCDBRNY


<바람이 분다>

이소라의 명곡. 말이 필요할까.


https://youtu.be/_4EN9OUme4s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루시드 폴. 이하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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