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작업실이요 쉼터인 나는 삼시 세끼 대부분을 집에서 먹는다. 아침저녁이야 식구들 때문이라도 요리를 하지만 혼자 있는 점심은 대충 때우기 일쑤다.
집안일 중 내가 선호하는 일은 ...없!다!
설거지, 빨래는 나름의 성취감이 있지만 청소와 요리는 귀찮다. 세 영역은 식구들에게 떠넘길 수도 있지만 요리는 오롯이 나만의 영역으로 되어 있다. 아무도 안 하니 나만의 영역인 거다.
그래도 그간의 경력이 있다고 하면 뭐, 나쁘지 않다. 식구들이 맛있게 잘 먹는다. 본격적으로 뛰어들기까지가 힘든 것이다.
장을 보고 가능한 재료로 창의력을 발휘하여 매일 음식을 만든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이 대단한 일을 하는 주부들은 정말 대단한 창작자들이다.
혼자 먹는 점심은 있는 반찬으로 대충 먹는데 밥조차 똑 떨어졌을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이럴 땐 라면이나 냉동실을 뒤져 냉동밥, 만두 따위로 대체하곤 하는데 오늘따라 그런 것들이 전혀 땡기지 않았다. 뭔가 몸에 덜 나쁜 음식을 먹고 싶었다. 냉장고를 뒤지는데 며칠 전 사 둔 미나리가 보였다.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버리게 될 게 뻔한 재료. 그래, 미나리전을 해 먹자.
미나리를 씻고 시든 부분은 따 내고 도마에 얹어 송송 썰었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나왔다.
희한한 일이었다. 보통 식사 준비를 할 때면, 단시간 초집중해서 빠르게 끝내는 스타일이다. 옆에서 누가 말이라도 걸면 손사래를 친다.
"말 시키지 맛!"
시종일관 비장한 표정으로 임하는 식사 준비에 난데없이 콧노래라니. 더군다나 저녁 메뉴로도 번거롭다는 생각에 패스하곤 하는 전을 구우려는 이 상황에 말이다.
응? 왜지?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나를 대접해 주는 느낌이었다.
허기를 채우려 대충 때우는 게 아닌, 정성스러운 준비 과정을 거쳐 나에게 대접할 생각을 하니 대접받을 내가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게다가 MSG가 첨가되지않은 천연 재료이기까지.
우리밀가루를 물에 개어 송송 썬 미나리와 청양고추를 넣고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노릇노릇 구웠다. 며칠 전에 새로 들인 인덕션에서는 유해 가스도 안 나온다(전자파는 모르쇠). 이것이야말로 친환경 콜라보레이션 점심 아닌가. 두 판의 미나리 전이 완성됐다. 익숙지 않은 인덕션 탓에 전이 훌러덩 찢어지는 오류가 발생했지만.
맛있으면 그만이지.
접시에 미나리전을 올리고 간장을 준비해 식탁에 앉았다. 전을 찢어 한 입 물었다. 적막강산에 홀로 앉아 나만을 위해 만든 음식을 먹고 있자니... 얼마나 맛있게요!
아삭한 식감의 미나리와 고소한 올리브유가 내 혈관에 붙은 찌꺼기까지 말끔히 쓸어가는 기분이었다.
암, 이런 게 진정 건강한 맛이지.
한 판을 휘릭 먹고 나서 잠시 고민했다. 배는 안차지만 혼자 커다란 전을 두 판 싹쓸이하는 건 선뜻 용납이 되지 않았다. 타협점을 찾았다. 팬에 놓인 미나리전을 반으로 갈랐다. 반만 덜어 접시에 놓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난 관리하는 여성이니까.
반쪽짜리 전은 순삭이었다. 별 수 있나.
나머지 반도 소리 소문 없이 처리되었다.
그래도 밥은 안 먹었잖아.
나를 위한 미나리전 두 판. 좋은 점심이었어!
나 자신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는 경우는 왕왕 있다. 그러나 특별하지 않은 한 끼 식사를 오롯이 나를 위해 준비하는 경우는 의외로 잘 없다. 주부들의 경우 더 그럴 것이다.
음식 하는 걸 귀찮아하는 내가 나를 위해 요리하는 즐거움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대충 때우기 십상인 한 끼에 작은 정성과 노력을 들여보니 생각지 못한 만족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시로 시도해 볼 수 있는, 아주 손쉬운 나를 아끼는 방법이 아닐까. 조금씩 조금씩 자잘하고 소소하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