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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May 25. 2021

비공식적으로 남편 얼굴을 공개합니다.

초상화는 까다롭습니다.

이제껏 제가 그린 초상화는 딱 세 점입니다.

까다로운 그림이다 보니 세 점밖에 안 그린 지요.


다른 소재는 상상해서 그리거나 원래의 형태를 벗어나거나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어요. 나무를 그릴 때 오른쪽으로 더 봉긋하거나 각도가 좀 기울어도 나무인 건 변함없지요. 하지만 얼굴은 다릅니다. 1mm의 차이에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버리니 그리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지요.


맨 처음 초상화는 친구였습니다. '내가 인물을 한번 그리려 하니 네가 모델이 되어 다오' 하며 요청하여 햇빛 내리쬐는 야외에서 명암이 뚜렷이 드러나도록 사진을 찍었어요. 그중에서 얼굴 구석구석의 갖가지 색이 잘 보이는 사진을 골라 그렸습니다.


두 번째 초상화는 어느 사제였습니다. 인물화를 그릴 생각에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 찍는 게 일이었던 때, 마침 찍힌 사진에 명암이 잘 드러나서 채택되었습니다. 찍힌 건 얼굴뿐이지만 손에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바꾸어 그렸습니다.


두 그림은 모두 그림 속 주인공에게 전달했습니다. 초상화는 전시보다 주인공 본인이 간직하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아 선물한 겁니다. 그림 전체를 공개하기엔 너무나 똑같이 그려(?...뇌피셜) 초상권 침해 문제가 있을 듯하여 일부만 공개합니다.

초상화 (부분). oil on canvas .  by duduni

세 번째 초상화는 우리 집 거실 중앙에 떡하니 걸려 있습니다.

그림의 주인공이 남편이거든요.

그림 선생님이 본인 남편 선물로 그렸다는 작은 공책만 한 그림을 보고 '이거 재밌겠다' 싶어 형식을 빌려왔습니다.

말하자면 램브란트의 자화상에 남편의 얼굴을 넣은 것입니다.


램브란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자화상을 통해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변화상을 볼 수 있지요.    

저는 젊은 시절, 멋진 의복을 입은 화려한 자화상을 점찍었습니다. 거기에 남편의 얼굴을 넣었답니다. 일종의 패러디, 또는 오마주라 할 수 있겠습니다. 


램브란트의 그림을 하나하나 따라 그리는 과정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거장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분이었지요. 원작에 있는 젊은 램브란트의 얼굴 각도와 엇비슷한 각도로 남편 얼굴을 찍고 그걸 들여다보며 그렸습니다. 이 얼마나 정성스럽습니까? 남편 사진을 토록 집요하게 후벼 판 아내라니요.


초상화. oil on canvas.  53× 45cm.  by duduni


이렇게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이 탄생했습니다.

생전 하지 않던 액자도 그림 분위기에 맞게 맞췄어요. 고풍스러운 금빛 액자를 입힌 그림을 남편에게 선물했지요.

그리는 과정을 봐서인지 큰 리액션이 있진 않았지만 헛웃음을 숨기지 못하더군요. 의도와는 다르게 코믹한 구석이 있으니까요. 처음엔 거실 벽에 자신의 얼굴 그림을 거는 것에 뜨악했지만 굳이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는 커피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 말고는 같은 취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서로의 취미를 싫어하거나 훼방 놓진 않아요. 카페에서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위로와 격려를 나누고 미래에 꿈꾸는 우리의 모습도 상상해보지요.  그 시간이 힘이 된답니다.


모든 순간이 좋을 순 없습니다. 삐걱대거나 미워질 때도 있지요. 그럴 때면 떠오르는 문구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이 문구를 제 방식으로 해석해봅니다.

미워진다고 계속 밉게 보면 정말 꼴도 보기 싫어집니다. 반대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사랑하게 되지요. 감정도 그저 놔두면 기 마련입니다.  원래대로 '유지'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내가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

썰렁+아재 개그라는 치명적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나를 웃게 해 주는 사람.

남편이자 아빠이자 가장이자 나의 친구가 된 사람.


벽에 걸린 우리 집 가장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봅니다.

그림은 그 자리에 거의 10년째 그대로 걸려있습니다. 지겹지 않냐고요? 볼 때마다 새로운걸요? 하루하루 그 시절로부터 멀어지고 있어 그런가 봅니다. 그림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때만 해도 파릇파릇 청년이었네...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 지나갑니다.

앞으로 손잡고 살아갈 시간들도 아름답고 다채롭게 그려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https://youtu.be/JyhkwxrOkBQ    

<이제, 여기에서>

- 마음에 들지 않은 음악이 없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많은 곡 중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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