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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Oct 14. 2021

에세이? 일단 거르고 본다

도서관에 가면 에세이 코너는 무조건 건너뛰었다. '하마터면 oo 할 뻔했다',  'oo 하지만, oo는 하고 싶어서' 같은 트렌디한 책 제목들은 오글거려 쳐다보기도 싫었다. 1등이나  나가는 건 거르고 보는 쭈글스러움의 발로라고나 할까.

에세이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견문이나 체험, 또는 의견이나 감상을 적은 산문 형식의 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내가 에세이를 읽고 싶지 않았던 건 누군가 견문이나 감상, 즉 타인의 시선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계 맺음이 어렵거나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관심 자체가 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건, 호감을 느끼고 알고 싶고 친해지고 싶고 자꾸 궁금해지는 단계를 거친다. 내 경우엔 이런 과정을 애초에 차단했다고 보면 된다.  


책의 장르에 대한 이런 편향은 인간관계와 관련이 있는 걸로 보인다. 생각해보면 20대 때는 에세이를 자주 읽었다. 잠깐을 만나도 마음을 활짝 열고 친구가 될 수 있던 때였다. 젊어서였기도 하고 직업 특성상 단련되어서였기도 했다. 2년 정도 환경단체에서 간사로 일했다. 첫 직장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풋풋한 젊은 청년이었던 난 그때 정말 별의별 사람들 만났다. 단체에서 추진하는 대부분의 업무에 다 관여를 했기에 사람 만나는 게 일이었다.


자연 캠프 개최(어린이부터 부모, 프로그램 별 강사, 자원봉사단), 핵발전소 실태 조사(각 환경단체 직원들과 대학생 환경 동아리), 청소년을 위한 환경 소식지 제작(청소년 및 교사), 지구의 날/물의 날 등 각종 행사(관련 기관인들), 우리 농산물 살리기 운동(생협 관계자 및 회원), 금연 운동(의사 및 고등학생) 등 대표적 활동 이외에도 사회 복지관이나 지역 생산자, 활동가들과 연계하는 일들이 많았다.   

만나고 연락해서 일을 진행하는 게 기본인 데다 끝없는 뒤풀이, 뒤풀이들! 거기다 우리 단체에 몸담고 일하는 활동가들의 온갖 넋두리를 들어주는 일까지!

뒤돌아보니 신기하다. 20대 중반 아가씨가 각 연령의 사람들과 별별 이야기를 나누며 돈독한 관계를 만들고 이어갔다는 것이. 그때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중간 조율을 해 주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게 적성인가 싶을 정도였다.  


나이가 들면서(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이런 인간관계의 문어발식 확장은 큰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에너지는 정해져 있는데 사방으로 뻗치기만 면 어쩐단 말인가. 범위가 넓은 만큼 내실이 부족했다. 예전에 만났던 수많은 사람과의 인연은 그때뿐이었으니.

나 살기 바빠 죽겠는데 더 이상의 확장은 피하자! 앞으로 새로운 관계는 만들지 말자! 있는 가족들과 있는 친구들로도 충분히 차고 넘친다.


그때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당일 그 자리에만 충실했다. 이후에 개인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간다던가 정을 준다던가 하지 않았다. 거창한 결심을 하거나 뭐 그런 건 아니고 넓고 얕은 관계 다 쓸데없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그렇게 대했다.

재미있는 건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친구들 중에도 비슷한 말을 하는 애들이 있었다. 마흔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밖으로 뻗어나가던 시선이 내 가족, 내 친구, 내 사람으로 압축되기 시작한 것이.

새로운 관계는 피곤하기만 하다. 있는 사람들한테나 잘 하자. 나도 관심 없지만 다른 사람도 나한테 관심 없다. 그래, 그래. 그러자!

무슨 인생철학인 것 마냥 착착 이행해 나갔다.


큰 아이 중학교 모임이 있었다. 같은 반 엄마들 몇이 모여 모임을 만들었는데 난 인생철학 대로 정을 주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참석했다. 모임은 학년이 올라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도 지속되었다. 참 희한한 모임일세, 이러면서 꾸역꾸역 참여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음 비슷한 것이 머리를 스쳤다.

아이들 나이가 같다는 것 말고는 일절 공통점이 없는 이 사람들과 별 탈없이 이토록 오래도록 만나는 게 보통 인연인가? 이렇게 정스럽고 좋은 사람들에게 애써 정을 안 줄 이유가 있나? 내가 너무 닫힌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건 아닐까?

그때부터 그들이 다르게 보였다. 시선을 돌리고 시야를 넓히니 모임을 나가는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고 관계가 의미 있게 느껴졌다. 중학생이던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갔고 엄마들끼리의 모임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음, 인생철학인 줄 알았는데 개똥철학이었나.


개똥철학이 눈에 띄게 흐트러진 건 브런치를 하고부터다. 구독하는 대부분의 글이 에세이다. 책등만 보고도 몸서리치며 건너뛰던 그 에세이 말이다.

브런치에서 한 편 두 편 생각 없이 읽다가 마음을 쿵 치는 글을 만난다. 댓글을 통해 느낀 점이나 못다 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기도 한다. 구독하는 작가의 글을 차곡차곡 읽다 보면 어느새 작가와 친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소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풀어놓으니 점점 관심이 가고 긴밀히 접촉하는 사이 같기도 하다.

작가가 한 동안 글을 안 올리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해지고, 걱정도 된다. 누군가가 책을 내면 어떻게든 구해서 읽어보고 싶다. 속을 털어놓은 글을 보면 위로하고 싶어 지고 내 마음도 그의 결을 따라가기 일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들었나 보다.


어느덧 도서관에서 에세이 코너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구독 작가들의 새 글 피드 읽기만도 벅차서 다른 에세이 책을 빌려 읽진 않지만 제목과 표지, 날개와 목차를 훑어보기도 한다.

허구의 이야기 속을 유영하다 찐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게 된 셈이다. '난 관심 없어'로 일관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관심이 생겨버렸고 그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고 공감하며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읽는 것뿐 아니라 쓰는 것도 그렇다. 처음에는 브런치에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브런치를 하기 전의 나처럼 말이다. 그러니 마음껏 써도 되지 싶다. 나는 스타일대로 깊이 파고들지는 못할 거지만.


요즘 브런치에 대한 재미가 영 시들해졌지만 세상 어떤 일에든 오르내림이 있는 법이니 그러려니 한다. 시들해진 김에 폰으로 글자 보는 것을 줄이려고 브런치 앱을 지웠다. 그러고 나서 알았다. 내가 브런치를 꽤 자주 들여다봤었구나, 하는 걸. 순간의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고 며칠 지나 다시 깔았다. 이거 이거 관심이 너무 생겨 버렸네? 삑! 경고 한 장!

개똥철학이 다시 들썩인다.       


***표지 사진 : 둘째가 30초나 들여서 그려 준 엄마 얼굴. 여간 까칠해 보이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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