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부모님의 혈액형을 잘못 알고 있었다. 아빠는 O형, 엄마는 B형으로 알았다. 남동생은 A, 여동생과 나는 AB다. O와 B가 만나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자식들인데도 아무도 부모님의 혈액형이 이상하다는 의심을 하지 않고 쭉 살아왔다. 제대로 알게 된 혈액형은 두 분 다 AB형이었다.
어느 초여름, 남동생을 뺀 나머지 네 명이 동해로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육아에 지친 딸들에게 콧바람을 넣어주려 하셨던 거다. 바다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새파아란 하늘에 몽실몽실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태풍 전야인지 지나고 나서인지, 거센 바람에 구름이 날리고 치맛자락도 머리카락도 날리는 황홀한 날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부모님은 사진에 일가견이 있으시다. 친정 거실 벽은 4절지 크기로 확대한 사진들로 도배되어 있다. 모델은 죄다 당신들이다. 젊은 시절부터 삼발이를 놓고 찍으신 거다. 색깔 맞춰 옷을 입고 모자나 스카프로 포인트를 준다. 모델은 멋진 배경을 뒤에 두고 화면 분할로 아래쪽 1/3 지점에 안정적으로 위치한 상태다. 몸은 살짝 비스듬히, 손은 자연스럽게, 45도 각도로 올린 시선과 능숙한 미소까지.
억새밭에 가서 내가 셔터를 누를라치면 진리를 설파하는 현자의 가르침과 같은 한마디가 날아온다.
“억새는 역광이다.”
말씀대로 역광으로 찍어야 보슬보슬 억새 털이 황금빛으로 빛나게 나온다.
바다를 배경으로 찍을라치면,
“머리는 수평선 밑에 있어야 된다.”
말씀대로 수평선 위로 불쑥 올라간 머리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사진에 진심인 부모님의 차에는 갖은 색상의 겉옷, 스카프, 모자가 상시로 실려있다. 그날은 파란 하늘과 바다색에 어울리는 하늘색과 아이보리색 스카프가 선택되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엄마가 스카프를 동생 목에 둘러주려던 그때였다. 세찬 바람에 스카프가 솟구쳐 올랐다. 기다란 스카프 한쪽은 목덜미에, 한쪽은 공중에 펄럭펄럭 날렸다. 꼭 목에 걸린 올가미 같았다. 그 모습이 우스워 우린 배를 잡았다. 그런 와중에도 사진을 찍었다. 바람은 자꾸만 세게 불고 스카프는 더 세게 날리니, 우아함을 연출하려던 스카프는 자꾸만 사진 바깥에서 누가 목을 잡아당기는 형상이 되는 거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육아 스트레스는 바람과 함께 날아갔다.
“이 모임 멤버 딱 좋네.”
“우리 한 달에 한 번은 이렇게 나들이하자.”
“좋지! 그러면 모임 이름을 정해야지.”
네 명 다 AB형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당시 혈액형별 특징이 유행이었는데, A형은 ‘소세지’, 즉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랄맞다는 식이었다. AB형은 지랄이 세 번 들어간 ‘지지지’다. 우리는 고상하기에 그런 말을 쓸 수는 없어 3Z로 명명하기로 했다.
3Z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줄기차게 진행됐다. 함양 상림숲, 기장 장어 먹방, 한티재 억새밭, 건천 은행나무 숲, 합천 황매산 철쭉, 경주 연꽃밭 등 너무 멀지 않으면서 산책과 음식, 경치를 충족할 수 있는 곳으로 쏘다녔다.
이 모임에만 오면 남편이고 아이들이고 생각이 안 났다. 아내와 엄마는 잠시 벗어두고 오직 부모님의 딸로서 보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여러 개의 모습으로 변신하며 산다. 적재적소에 재빠르게 변신하며 역할을 해 내느라 하루가 바쁘고 고달프다. 내게 가장 편안한 딱 하나의 모습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에게는 그 하나의 모습이 되는 순간이 3Z였다.
가열차게 이어지던 3Z 모임이 시들해진 건 여동생이 경기도로 이사를 가면서부터다. 별 계획 없이 거기 어때? 좋다, 가자. 이랬을 때가 편했다. 거리가 멀어지니 미리 계획하고 벼르고 만나야 하는 거다. 남은 세 명이 몇 번 시도하다 코로나 시대를 맞았다. 3년째 콧바람이 갇혀 있다. 멤버들 모두 답답할 거다. 일상 회복이 많이 되었다고는 하나 부모님 연세가 있으시니 마냥 안심하고 다닐 수도 없다.
웃느라 부여잡을 배와 웃음소리로 진동할 울대 근육을 단단히 강화시킬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하는 3Z 모임 반나절 나들이. 코가 뻥, 가슴이 뻥 뚫리는 3Z 모임이 재개될 날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