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순삭'되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2시간 40분이 지나있었다. 660여 일만에 간 영화관이었다. 이렇게 설레 하며 기다려서 본 영화가 몇 없다.
어느 날 웹서핑 중에 영화 '듄'이 개봉 예정이라는 기사를 봤다. 익숙한 제목인데, 싶어 몇 줄 읽어보니 SF소설의 고전 듄을 다시 영화화했다고 쓰여 있었다. SF소설의 고전? 그럼 무조건 읽어야지. 의식의 단순한 흐름으로 책을 빌려 읽었다. 읽고 나니 이 책이 영상으로 도대체 어떻게 표현될지 너무나 궁금해지는 거다. 영화관 큰 화면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 예매를 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혼자 영화 보러 간다는 말에 남편이 영화를 왜 혼자 보냐며 휴가 때 같이 가자는 거다. 음... 혼자 몰입해서 보고 싶었던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날을 잡아 예매를 했다. 내친김에 미술관에도 가잔다.
웬일이래? 나야 좋지.
미술관도 사전 예약을 했다. 영화관 옆 미술관까지 섭렵하게 될 660일 만의 문화의 날이 밝았다.
영화가 시작하고부터 난 완전히 빠져버렸다.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떠올렸던 장면들이 화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삭막한 아라키스 행성과 거대한 우주선, 신비한 모래벌레가 내 상상 이상으로 구현되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화면 밖으로 불어닥칠 듯 생생했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하는 지점에서 갑자기 자막이 올라갔다.
엉? 벌써 끝났다고?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난 당황스러웠다. 책으로 치면 절반쯤에서 끝난 거다. 시간이 그렇게 지난 줄 몰랐다.
하기야... 그 방대한 내용을 어떻게 한꺼번에 다 담겠어? 와, 근데 정말 잘 만들었다!
어느새 팬심이 생긴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을 돌아보니 남편은 뚱한 표정이었다. 내용을 미리 알고 보고 싶다기에 스토리를 설명해주면서 스펙터클한 SF는 아닐 거라고 귀띔은 했지만 역시.
"난 별론데."
책을 안 읽은 사람한테는 재미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토닥거려주었다. 그렇다고 내 벅찬 마음을 숨길 필요는 없지.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나는 감탄사를 동반한 감상평을 주절주절 읊어댔다.
"거기다 티모시 살라메는 연기 왜 그렇게 잘하는 거야? 크! 그 눈빛!"
"그 남자 볼라고 갔구만."
"솔직히 매력적이잖아. 청년미에 병약미까지..."
영화에 대한 느낌은 나와 달랐지만 영화 보면서 옆에서 한마디도 말을 안 걸어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대구미술관에서는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매그 재단과 공동 주최하는 해외교류전(모던 라이프 전)이 유료로, 이인성 미술상 수상자(강요배 작가)전이 무료로 열리고 있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전시 설명을 읽으며 우리는 앞다투어 핏대를 세웠다.
"뭐? 전이와 변용적 측면? 저걸 꼭 저런 말로 써야 되냔 말이야. 내가 이래서 미술 설명을 안 좋아하는 거라고!"
"그러니깐. 정말 읽기 싫게 써놨네. 이런 게 문제야! 쉽게 풀어 쓰면 어디가 덧나냐고."
이럴 땐 죽이 얼마나 척척 잘 맞는지. 애먼 설명판 앞에서 단어 몇 개 가지고 돌아가며 잘근잘근 씹어줬다. 그러고는 개운한 기분으로 우아하게 전시장으로 입장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femme de venis 3> photo by duduni
처음 들어간 방에 자코메티의 조각상이 떡하니 서 있어 깜짝 놀랐다. 사실 지적하는데 정신이 팔려 설명을 제대로 안 읽은 탓에 무슨 전시인지 잘 모르는 상태로 들어간 것이었다. 난 오랜만에 예술의 향기에 취해 전시장을 거닐었다.
한 작품 앞에 남편이 서 있었다. 다가가 그림을 보는 순간, 우린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너무 성의 없는데...."
"나도 이런 그림은.... 이래서 유명해야 되는 거야. 유명하면 뭘 그려도 와! 하니까."
지극히 주관적 취향임을 밝힌다. 다들 어떤 느낌인지 아실 거라 생각한다. 긴 설명은 생략하겠다.
/앤 매든 photo by duduni
장 미셀 뫼리스 / 정병국 photo by duduni
각자의 취향대로 좋은 그림 앞에 오래 머물고 별로인 그림 앞에선 구시렁구시렁 트집을 잡으며 그림 숲을 산책했다.마음에 드는 그림들은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방에 들어갔을 때 일순 걸음을 멈췄다.
아니! 이건! 마르크 샤갈? 응? 호안 미로! 칼더도 있네? 대박!
마르크 샤갈 <la vie> photo by duduni
호안 미로 / 알렉산더 칼더
호안 미로 photo by duduni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그림에 눈을 대고 가까이 들여다봤다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편이 말했다.
"유명한 그림 앞이라고 너무 오래 서 있는 거 아니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명세에 대해 입을 삐죽거렸던 난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냥 유명한 정도가 아니잖아. 아~~~주 유명한 그림이라고. 아! 미로의 예술혼 좀 더 느껴야겠다!"
나의 얄팍하고 줏대 없는 기준에 양심이 찔렸지만 좋은 걸 어쩐단 말인가.
2층엔 미술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이 있다. 큰 통창에서 들어온 풍경과 자연광이 그림과 함께 어우러지는 방이다. 강요배 작가의 대형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공중에 걸린 화면에선 작가의 작업 장면과 제주의 자연 풍경이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잠시 앉아 영상을 감상했다. 파도 소리와 함께 눈이 영상에서 창밖 풍경으로 그리고 그림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한쪽 벽 전체를 가득 채운 그림은 압도적이었다. 작품은 소리와 공간 속에 자리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디행히 왼쪽에 빈 자리가 있었다 (전시 제목 : 카네이션 - 마음이 몸이 될 때) photo by duduni
강요배 <수풍교향. 2021> 화폭16m photo by duduni
전시장엔 내내 파도와 바람소리가 흘렀다. 소리의 파동 속에서 시각적 경험을 하니 그림의 감흥은 배가되었다.
전시장을 다 둘러보고 나왔을 때, 마음에 남는 그림은 유명 작가의 그림이 아니었다. 특별한 감상의 순간을 안겨 준 강요배 작가의 그림들이었다.
강요배 <코발트 블루 외> photo by duduni
강요배(태풍이 불어닥친 숲...을 그린 작품인데 제목이 생각 안 나네요.) photo by duduni
강요배 <벌과 홍매 / 먼나무> photo by duduni
미술관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보냈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미술관을 걷는 건 산책길을 걷는 것과 달리 체력 소모가 심했다. 기진맥진한 우리는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원기 보충을 하며 마무리를 했다. 온갖 트집과 투덜거림으로 버무린 문화의 날이었지만 오랜만의 눈호강이었다.
영화로 미술로 표현해 낸 작품들을 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이런 문화생활을 한다고 밥이 생기고 돈이 생기는 건 아니다. 평소에 건드려지지 않던 부분이 깨어나고, 뜬금없는 감동을 느끼고, 알 수 없는 충만함이 생기고, 가라앉았던 의욕이 샘솟을 뿐(!)이다. 크기와 양을 잴 수 없는 이 만족감이 우리가 문화를 누리는 이유일 것이다.
앞으로 좀 더 편하고 자유롭게, 누구라도 쉽게 문화 예술을 감상할 수 있게 되기를.모두가 그런 즐거움을 알게 되고 만끽할 수 있기를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