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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풍뎅이 Jan 16. 2020

엄마의 딸, 딸의 엄마

그 사이에서


엄마와 오래간만에 통화를 했다. 매일 저녁, 아이와 영상통화 거는 게 일상이었는데 아이가 부끄러운 건지 하던 놀이에 방해된다 생각하는 건지 안 하려고 해 점점 뜸해지던 차였다. 집에서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서둘러 집 앞 카페로 왔다. 따뜻한 라떼를 주문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트에서 일하시는 엄마는 설을 앞둔 요즘이 가장 바쁠 때다. 지친 목소리의 엄마는 어쩐 일이냐 물었고 그냥 해봤어 라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나는 살가운 딸이 아니라 낯간지러운 말도 못 하고 애교도 없다. 엄마 또한 딸에게 살갑고 다정한 엄마는 아니다. 엄마는 우리 세 자매가 어릴 적부터 엄했고 특히 잘못한 행동에 대해선 칼같이 혼내셨다. 당근과 채찍으로 비유하자면 당근 1에 채찍이 9였다. 그래서 난 딸을 낳고 다정한 엄마가 돼줘야지 몇 번을 다짐해왔다. 

난 우리 엄마처럼 안 키울 거야. 칭찬도 많이 해주고 항상 다정하게 대해줄 거야.라고

그 결심은 매번 흔들리고 어떤 날은 위태롭기도 하다.


아홉 살 무렵이었다. 언니와 동생이랑 엄마가 가지 말라던 물가에서 몰래 물놀이를 하고 왔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엄마가 무서워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던 우리는 집 옆의 빈집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결국엔 엄마에게 들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드려 맞았다'는 표현처럼 매타작을 당했다. 이 일은 아직도 우리 세 자매의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정작 엄마는 기억을 못 하신다. 상황설명을 하니 엄마는 우리가 놀던 물가는 보건소에서 나오는 안 좋은 폐수가 내려오는 곳이었다며 그곳에서 노는 게 찝찝하고 걱정스러웠다고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로 잘 타이를 수도 있지 않았나 미혼일 때 아이가 없을 땐 그리 생각했다.


한 해 한 해 커가는 아이를 보니 지금은 우리가 오죽 말을 안 들었으면 엄마가 그랬을까 오죽했으면..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말로 타이르기. 이상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겠지만 현실은 꼭 이론과 맞지 않는다. 고집이 어마어마한 아이를 말로 설득하려면 내 감정도 격해서 잘 안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때리는 건 정말 하지 말아야 한다.) 그나마 내 경우는 아이 하나에 육아 참여도가 높은 남편이라 스트레스 지수가 낮지만 엄마의 젊은 시절 딱 지금의 내 나이때 아이 셋에 매일 늦는 남편에 어려운 형편에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거다. 육아는 둘째치고 두부 한모 사는 것도 고민했고 고기는 어쩌다 먹는 특식이었으니까.


매타작의 나쁜 기억만 부각돼서 그렇지 우릴 그렇게 때리고 엄마도 많이 미안해하시지 않았을까. 한바탕 난리 후 엄마가 쪄줬던 감자의 맛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우리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 담긴 감자였다. 


일전에 쓴 '나의 로망 소풍 도시락'에서 엄마가 돼보니 원망스럽고 이해가 안 되던 예전의 엄마 행동들을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고 썼었다. 맞다. 그 말은 여전히 앞으로도 유효하다. 내 기억 속 여러 앙금들은 이해로 풀어가며 딸아이와는 되도록 흉지는 상처를 남기지 않게 매순간 고민하고 노력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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