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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풍뎅이 Jan 29. 2020

다시 일상

명절을 보내고


추석 지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설이다. 내게 예전의 명절은 '쉬는 날'이었다. 명절엔 오로지 쉬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를 따라 큰집에 가는 것이 싫었다. 가서 불편하게 자는 것도, 좁은 거실에서 다 같이 차례상에 절하는 것도, 무엇보다 다니는 직장은 어디인지 연봉은 얼마인지 물어보는 친척들이 싫었다.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 '어린이의 명절'은 좋았다. 어른들이 주시는 용돈도 좋았지만 큰집 가면 작은방에 가득 쌓여있던 전, 고기산적, 한과, 약과, 삶은 닭 등이 좋았다. 음식 하느라 힘들었을 큰엄마, 작은엄마, 우리 엄마의 수고는 어린 마음에 알지 못한 채 친척 오빠들(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이랑 '마루치 아라치'를 보며 전을 집어먹고 식혜를 마셨었다.


또 하나 좋았던 건 당시 차가 없어 온 가족이 성내동 큰집에 가려고 동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왔는데 터미널 앞 포장마차에서 먹던 가락국수이다. 훈기 가득한 포장마차 안에서 가락국수 네 개를 시켜 먹었다. 늘 동생은 엄마와 같이 나눠먹었다. 어쩌다 먹던 경양식 돈가스나 짜장면 모두 엄마와 동생은 1인분을 나눠먹곤 했다. 그땐 왜 그게 당연했던 건지.

면을 호호 불어가며 먹던 맛은 기가 막혔고 그 맛을 다시 추억할 겸 서울에서 직장 다닐 적 언니와 사 먹은 적이 있다. 그때 그 맛이 안 난다고 하니 언니는 우리가 돌을 씹어 먹어도 맛있을 나이여서 그랬던 거 같다 했다. 

이렇게 맛깔스러운 명절 음식과 터미널 앞 가락국수로 좋았던 명절은 머리가 크고 나서부턴 아무 데도 안 가고 집에서 발 뻗고 쉬고 싶은 날이 되었다.


결혼을 하니 명절은 미혼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고향집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설레었던 나는 이제는 시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간다. 우리 시댁은 제사도 안 지내고 명절 당일 친척들끼리 모여 밥 먹고 헤어지는 게 다다. 그래서 시댁 얘기를 하면 다들 부러워한다. 제사에 벌초에 김장 등 집안 행사가 많은 동생도 어린이집 엄마도. 


난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하는 부담감은 전혀 없다.  다만 가기 전, 마음이 편치 않다. 원래 시댁은 잘해주셔도 불편한 존재라는데 어머님과의 관계가 그다지이라 더 그렇다. 딸을 낳고부터 쌓인 감정들이(아마 어머님도 그러실 테지) 방문 일주일 전부터 소화불량과 초조함에 시달리게 한다. 가서 부엌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도 싫다. 어쩔 땐 소심하고 손 작은 내가 주방일 하는 걸 보며 답답해하시기도 한다. 그 기색에 죄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눈치가 보일 때도 있었다. 절정은 재작년 추석 때였다. 명절 전날 남편과 대판 싸워 연휴 내내 아무 데도 안 가고 냉전 상태였다. 어머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남편은 혼나지 않았지만 난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른들 기다리시는데 네가 잘 풀어서 왔어야지. 아니면 전화라도 했어야지. 이 말을 들으며 나만 혼나는 상황이 억울했다. 또 원망했다. 남편을, 어머님을.


한참 안 좋았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작년 가을쯤부턴 나도 스스로 포기하는 부분이 생겼다. 욕 안 먹고(?) 좋은 말만 듣고 싶었던 욕심을 내려놓게 됐다. 쓸데없이 보던 눈치도 의식적으로 안 보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방문 전에 시달리던 소화불량과 초조함이 줄었다. 예전보다 어머님을 대하는 게 조금은 편해져서 그런지 어머님도 내게 유해 지신 느낌도 든다. 

여전히 편하고 살가운 고부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이 되어가는 거 아닐까. 

명절은 이렇듯 편함과 불편함 사이 그 언저리에 존재한다. 


이 글을 썼던 1월 23일이 지나고 설을 무사히 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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