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에 내 꽃 나오기까지

숨 가쁜 촬영 뒷이야기

by 한꽃차이

이 드라마 볼까 말까 할 때 대개 작가, 배우, 스토리, 배경에 따라 결정하지 않을까? 내게는 더 중요한 게 하나 있다. 꽃이 나오는가.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 꽃이 그 장면에 나오는, 나와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하는 게 즐겁다.


의미뿐 아니라 시각적 요소로도 꽃만 한 게 잘 없다. CF나 아이돌 뮤비를 찾아보는 이유도 꽃장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다. 나라면 저 장면에서 여러 컬러는 좀 산만해. 신비로운 블루 보라 컬러만 넣었으면 더 가사와 잘 어울릴 텐데. 저 조화는 너무 조화 티 나는데, 들고 있는 꽃 한 송이는 커다란 작약으로 해도 좋았을 텐데 상상하며 재배치 놀이를 한다. 꽃을 마주하거나 작업하고 있지 않아도, 상상 속 작업 속에서 이미 충분히 행복한 나란 사람. 그러니 실제 요청이 들어오면 심장이 뛴다.


중요한 드라마촬영 데코가 있는데 늘 그렇듯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던 그날, 촬영지는 평창동의 큰 아트센터였다. 유명한 작가가 전시회를 열어 자랑하는 장면이기에 '최대한 화려하게'가 요구사항. 한가득 가져간 꽃으로 시작하려는데 충격적 소식. "아트센터 오픈 전이라 화장실 사용이 안 됩니다." 앗 그러면 시작할 수가 없는데 - 가 아니라 계획 전면 변경이다!

물을 나중에 넣어도 가능하게 바꾸자. 유리화병에 물을 가득 담아 무게를 채우고 피치색 수국을 담은 후 플로랄 폼을 올려 막고 꽃이 흐드러지게 꽂으려던 꽃폭포작업은 최소화하기로 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화려함에 정점을 찍고 멀리서도 보일 꽃폭포를 없앨 수는 없다. 다른 부분들을 조금 더 시간대비 효과가 좋게 변경하면 된다.


손이 2배속으로 움직인다. 지금 작업을 손으로 하면서 다음 작업을 시뮬레이션하느라 뇌가 2개로 나눠져 4배속으로 돌아간다. 요리대회 나왔는데 내 인덕션만 고장 나서 에어프라이기로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어차피 네비 없는 길 같은 이런 작업, 공사 중이거나 길이 막혀서 돌아가야 하는 일은 종종 발생한다. 운전할 때 새로운 길로 가는 걸 좋아하는 플로리스트는, 작업할 때도 돌발상황을 즐긴다. 다양한 길 체험은 운전실력을, 예상을 벗어나는 꽃일은 꽃실력을 향상하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요구사항 변경도 종종 발생하는 변수다. 당연한 게, 그분들은 꽃을 잘 모르니 막연히 상상해서 요청한다. 실제로 꽃을 보면 느낌과 양을 알게 되니 원하는 게 달라진다.

이 센터피스 10개는 미리 만들어감

"이 꽃을 더 넣어주세요" (그럴 줄 알고 더 가져왔음!)

"이 컬러가 더 많았으면 좋겠네요" (요구사항에 없어도 준비한 나의 킬링 컬러, 오늘도 한몫!)

"하나 더 만들어주세요" (역시 여분을 가져와도 한송이도 안 남을 줄 알았음!).


촬영 시작 10초 직전에 끝내고 뛰어나온다. 가을인데 땀이 난다. 항상 여유 있게 도착하는데도 꼭 돌아가게 되고 결국은 제한시간에 세이브! 그 바쁜 와중에도 내 꽃줄기들을 싹 치워준 케이터링팀 덕분이다. 심지어 일하는 내 사진까지 남겨주고 따뜻한 커피와 김밥을 내미는 센스쟁이 대표님! 피로가 싹 풀린다.

심지어 마치고 집에 가다가 전화를 받고 유턴. 길에 서서 8분 만에 3개를 더 만들어드렸다. 웬일로 꽃이 남았다 싶었더니 역시나 다 썼다. 담당자가 감탄하다가 고마워하며 멀어지자, 담당자 대신 케이터링 대표님이 미안스러워하신다. '아유 갑자기 부탁해도 이렇게 뚝딱 잘해주면 늘 이래도 되는 줄 아는데..' 그래도 별수 없다. 실력을 증명했다고 여길 수 있다.




6개월이 지났다. 드디어 내 꽃이 보이는 장면이 나왔다!

106개국에서 방영되고 있고 그중 19개국에서 1위라고 한다. 가볍게 볼 드라마 찾는다면 추천! 잘생긴 남자가 마구 나오는 캠퍼스 로맨스라, 세상 무해하고 사랑스럽고 상큼하다.

역시 저 핑크가 보일 줄 알았지. 언뜻 비쳐도 뿌듯하다. 이제야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한 걸 확인한 기분이다.

다음 내 꽃은 어느 장면에서 화려함을 더할까, 보이지 않는 숨 가쁨까지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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