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피로연인데 비가 내리면

돌발상황에 호기롭게 대처하는 플로리스트의 자세

by 한꽃차이

봄가을 토요일에 비가 오면? 나처럼 운전 많이 하는 플로리스트에게는 희소식이다. 대개 차가 덜 막히니까. 놀러 가는 차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멀리 이동해서 일해야 하는 날이면 좀 안심된다.


야외 웨딩 피로연이 있는 날은 예외다. 과천에서 수업 후 마포까지 가야 해서 차가 덜 막히는 건 감사하지만 말이다. 최선은 시작 전에 비가 그치는 시나리오. 하늘은 내 통제 안의 무대가 아니기에 그칠 듯 그칠 듯 보슬비 꼬리가 그날 저녁 유난히 길었다. 높은 빌딩 많은 공덕역 한복판에 있는데도 하늘이 보이는 소규모 결혼식장은 비가 와도 촉촉하게 예뻤고. 타들어가는 속마음은 꺼지지 않았고.

2부 피로연은 7시. 5시부터 시작했을 케이터링 음식 세팅이 미뤄졌다. 케이터링 테이블 위에 놓을 플라워 세팅도 함께 미뤄졌다. 6시에 비가 그치면 야외에 네 테이블, 비가 안 그치면 실내에 세 테이블. 결혼식장이 바라다보이는 대기공간은 음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살금살금 꽃게걸음으로 겨우 지나다닐 공간만 남아있다. 혹시나 음식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이라는 아찔한 상상에 배에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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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은 비가 오고 꽃준비를 할 수 없는 상황. 야외와 실내 두 가지 경우 모두를 머릿속에 계속 그려본다. 가장 먼저 할 일과 순서, 공간이 모자라면 뺄 꽃까지. 짬짬이 할 일과 연락도 챙긴다. 요즘 핫한 이 결혼식장의 영상과 사진도 가득 남긴다. 구석구석 가득 담긴 센스 넘치는 공간에 해 질 녘 감성과 빗소리까지 더해진 이 순간. 분주한 중에도 행복함을 놓치지 않는다. 앉았다 일어섰다 금세 초집중. 누가 보면 촬영하러 온 포토그래퍼인 줄 알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직원 같기는 한가 보다. 손님들이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신다. 두 손으로 공손히 알려드린다.

결혼식장 풍경으로 눈호강도 한다. 이 플라워 세팅은 담당하는 웨딩 전문 플라워팀이 따로 있다. 유명하고 실력도 어마어마한 팀이다. 나는 케이터링 테이블 플라워데코만 케이터링 팀과 협업한다. 컬러, 콘셉트, 주의할 점은 웨딩 스튜디오에서 전달받는다.


플라워팀이 정확히 어떤 꽃을 쓸지 모르기 때문에 변수가 가득하다. 이 컬러와 콘셉트에 나라면 쓸 꽃을 생각하고 좀 더 준비하는 수밖에. 다이내믹을 즐기는 성격이라 예측이 맞는 즐거움도 누린다. 핑크는 얘기가 없었는데? 괜찮다. 이 정도 투명하고 하늘하늘한 핑크는 어디든 어우러지니까.


드디어 6시. 저녁에는 그친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비는 여전하다. 차라리 많이 오면 야외감성을 일찍 포기했을 텐데 추적추적 딱 미련을 남길 만큼 온다. 아무래도 오늘의 신랑신부는 영화 '어바웃타임'의 결혼식만큼 많이 웃고 행복하게 살려나 보다. 신부가 정형화된 미인형은 아니지만, 유난히 미소가 해맑다. 2부 드레스도 알프스 느낌으로 소녀스러워서 영화 속 여주인공, 메리가 겹쳐진다.


1부로 70여 명 코스요리 대접을 하고 2부는 친구들 위주로 또다시 70여 명 뷔페 피로연을 한다니 인맥부자인 듯. 물론 결혼식에서 친구 사진 3번 나눠서 와글와글 찍었던 사람으로서, 그 인연을 다 유지하고 살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소중한 주말에 와준 마음에 대한 감사함, 단체로 연습해서 신나게 축가를 불러줬던 사람들이 전해준 명도 높은 축복, 진심으로 기뻐해줬던 친구들 덕분에 팔딱이던 즐거움은 생생히 살아있다. 이 부부의 결혼식에도 비까지도 예쁘게 남겠지. 지인 결혼식이 아니라서 더 여유와 상상의 여지가 많아 혼자 재밌다. 긴장되는 시간도 소소한 호사를 누리고,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할 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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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10분. 결국 실내 가장 바깥쪽에 테이블을 세팅한다. 케이터링팀과 테이블을 펴고 천을 깐 뒤 바깥구석 1/3평에서 꽃을 꺼낸다. 70%의 작업을 해왔기에 가능하다. 총괄 매니저님이 꽃을 보시더니 감탄하신다.

"어머 꽃이 정말 예뻐요!" "와아 이렇게까지 준비를!"

예쁜 꽃과 결혼식을 수없이 보시는 분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닌 진심 가득 담긴 감탄을 해주시니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의 콘셉트는 빈티지 블루와 하늘하늘 거리는 그린, 그리고 화이트. 뾰족 거리는 에키놉시스를 중앙에 놓아 시선을 사로잡는다. 찔리면 무척이나 아픈 꽃이라 조심해야 한다. 신문지가 아닌 비닐로 따로 싸와서 마지막에 꽂아야 한다. 안개처럼 조그맣고 하얀 레이스플라워, 하늘하늘 늘어지는 카키색 아스파라거스가 강렬히 대비되어 에키놉시스를 중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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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의 분위기는 아스파라거스가 1등 공신이다. 손님들이 혹시 건드려서 화병이 쓰러지지 않게, 음식에 닿지 않게, 풍성하게 늘어지되 과하지는 않게 - 한줄기 한줄기 매만져 위치를 다시 잡아본다.

하늘거림 가운데 명확한 포인트. 얼굴은 커도 줄기는 하늘거리는 스카비오사이면 충분하다. 카라 줄기는 마사지해서 원하는 방향대로 구부릴 수 있다는 사실! 물론 현장에서 마사지하고 있을 시간은 없으니 미리 해서 조심스레 운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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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톤 컬러, 늘어지고 하늘거리는 여린 줄기라면 클레마티스를 빼놓을 수 없다. 사이사이, 여리여리한 들꽃 느낌 시네라리아도 빠질 수 없다. 올해 무척 핫했던 꽃이다. 테이블 수가 줄었으니 음식 놓을 공간도 꽃 놓을 공간도 좁아서 딱 여기까지. 나머지 꽃은 아쉬워도 그만 놓는 게 좋다.

마지막으로, 촛대에 초를 끼우는 구멍이 초보다 클 경우 꿀팁! 아주 작게 차이 나면 초 가장 아랫부분에 스카치테이프를 감아서 끼우면 된다. 그 정도로 안 되겠으면 스카치테이프를 꾸깃꾸깃 감는다. 크게 차이 나면? 뽁뽁이를 가늘게 잘라서 둘둘 감고 넣으면 표 나지 않는다.


세팅을 다 하니 딱 그치는 비. 웃음이 나온다. 이것이 인생! 어바웃타임처럼 미리 알 수는 없어도, 한번 살아봤던 날처럼 여유롭게 즐기면 제법 영화 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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